(1952년)'국제구락부 사건' 발생;전쟁통 속에서도 자신의 재집권에만 정신을 몰두하고 있었던 이승만! 한국 정치의 왜곡된 발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1950년5월30일 선거에서 야당의 압승으로 간선제에 의한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한국전쟁 중 직선제 개헌을 시도한다. 그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그의 재집권 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하였고, 특히 국회 내 다수파는 이승만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키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 직선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도, 이를 두고 이승만정부와 국회의 갈등이 격화되어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당시 한국은 6*25전쟁중이였다. 전시 체제하에서 국정운영의 안정이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이승만은 자신의 재집권에만 정신을 몰두하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이였음에도 권력 투쟁이 격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국제구락부 사건'이 일어났다.
1952년6월20일 오후, 전쟁 중이라 임시수도로 사용하던 부산 남포동에 위치한 국제구락부에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이 모여 '반독재 호헌 구국선언 대회'를 진행하던 중 정체불명의 폭도들이 난입하여 야권 인사 30여명을 체포 및 구금하였다. 곧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는데 방해가 되는 야권인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구속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물리적 강압수단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정세 속에서 1952년7월4일 발췌한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28일에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1952년 대선에서 재선되는 기반이 되었다.
이 구금사건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부담스러웠던 고등검찰청은 야권인사들이 구속된 지 25일만에, 국제구락부 사건 관련자 전원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8월14일 광복절 특사로 모두 풀려났다. 이렇게 사건 관련자 모두에 대한 불기소처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이승만이 독재권력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킨 반민주적 정치폭거랄 수 있다. 국제구락부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시상황 속에서도 정치적 권력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으며, 이승만 정권의 권력유지방식과 그로 인한 한국 정치계의 왜곡된 발전 양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