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평양으로 간 여대생, '임수경 사건';통일이란 무엇인가? 여전히 우리는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1989년6월30일, 한 여대생이 분단의 벽을 넘어 평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충격과 논란을 준 이 사건의 주인공은 임수경. 그녀의 방북은 단순한 '여행'이나 '이벤트'가 아니였다. 이는 민간 통일운동의 상징이자, 남북관계에 새로운 물음을 던진 역사적 사건이였다.
그녀는 왜? 그리고 어떻게 평양에 갔을까?
당시 한국사회는 민주화열기로 가득했다. 6월항쟁 이후 직선제가 도입도었지만, 여전히 남북관계는 냉랭했고 국가보안법은 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의 정치적관심은 '통일'로 향했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은 그 중심에 있었ㄷ. 당시 한국외대 불어과 재학생이던 임수경은 전대협의 통일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이 평양에서 개최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베를린을 경유해 방북하게 된다. 이 결정은 수많은 파장과 논란을 불러왔다.
정부는 격분, 시민은 분열
임수경의 방북은 명백히 정부의 사전승인없이 이뤄진 불법행위였다.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함께 방북했던 문규현 신부도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법 위반'의 프레임으로만 보기엔 무언가 더 있는 듯 했다. 많은 청년들과 시민단체는 그녀의 용기를 지지했고, '통일을 위한 민간의 첫 발걸음'으로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 체제를 찬양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통일담론이 '금기'에서 '현실'로 떠오르기 시작한 순간이였다.
임수경의 유산, 그리고 통일에 던진 메세지
임수경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몇 가지 의미를 던져준다.
첫째, 국가가 아닌 시민이 남북 간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둘째, 대학가와 청년층을 중심으로 통일문제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진 점.
셋째, 표현의 자유 그리고 왕래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이후, 임수경은 사면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통일과 인권, 평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임기 초반에 일어난 여러 막말 사건 때문에 이미지가 실추되고, 진보 진영 안에서 외면당하면서 결국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1989년의 평양방문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였다. 그곳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물음이 던져진 장소였다. 임수경의 방북은 찬반을 떠나, 우리에게 '통일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 사건이였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989년 방북 당시 촬영된 미공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