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5년)영조의 탕평책;을사환국을 계기로 소론에서 노론으로 물갈이하고, 탕평책을 펴서 차별을 없애다. 임인옥사,을사처분,탕평채,탕평비,탕탕평평실,노론소론,붕당.

2024. 3. 22. 11:56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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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왕위에 올라 즉위한지 1년차. 정국은 경종때부터 여전히 소론이 주도하고 있었다. 경종때에 겪었던 신임옥사로 화를 입었던 노론들은 영조가 즉위하자 자신들에게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영조는 경종의 뒤를 이어 삼정승에 소론들로 구성하였다. 그런 한편,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이것은 노론의 재진출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영조 어진

경종 국상 직후 1724년 11월, 이의연이 상소를 올리면서 소론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고, 이후 이봉명을 비롯해 노론 인사들의 소론에 대한 공격상소가 계속된다. 영조는 일단 소론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이의현을 절도에 멀리 귀양보내고 소론을 대표하는 인물 김일경도 삭직하였다. 이의연과 김일경을 같이 처벌한 것은 영조가 탕평을 취하기 위한 정치운영술인 양치양해를 적용한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후, 임인옥사를 일으킨 장본인 목호룡과 김일경과 함께 참수하였고, 이의연도 옥중에서 사망한다. 

다음해, 승지 윤봉조가 상소를 올려 소론 측 삼사관원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자, 영조는 소론측 관원들을 대거 축출하였다. 이때 을사년이라 하여 을사환국이라 명하고 환국이 시작되었다. 소론측을 대거 축출하고 그 빈자리들을 노론측 인사들로 속속 채웠다. 1725년 3월, 정승에 오른 정호와 민진원의 요청에 따라 과거 '신임옥사'를 소론에 의한 무고로 판정하고 죄를 입었던 사람을 일체 신원하는 '을사처분'을 단행하여 그간 정권에서 배제되어 온 노론세력의 집권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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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으로 조정을 둔갑시켰다고 해서 영조가 노론만을 편애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당쟁을 없애기 위해 날마다 연구를 한 끝에 '탕평책'을 실시한다. 이것은 곧 붕당에 상관없이 능력있는 자들에게 골고루 벼슬을 나눠주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이렇게 함으로써 힘의 무게가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저들의 힘을 분산시켜 왕권의 힘을 강화하고자 함이였다. 탕평책은 상직관들의 쇠락을 방지하고 양반들과 비얀반들의 지위격차를 축소하여 권력을 분산하여 현대적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출신성분을 막론하고 대등한 기회를 줘 어두운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혁사상이며 혁명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탕평책을 이야기 할 때 '탕평채'라는 음식을 내놓았다고 한다. 녹두묵에 고기볶음, 미나리, 김 등을 섞어 만든 묵 무침인 '탕평채'가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최고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 입구 다리 위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대왕도 '탕탕평평실'이라 할 정도로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정조는 능력이 있다면 서얼(양번 첩의 자식)도 벼슬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영*정조의 적극적인 탕평책실시로 조선의 정치는 잠시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다시 긴 쟁정이 시작되었다. 

탕평비
탕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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