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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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이괄. 왜 그가 왕따였는지... 이러니까 눈 돌아가지~
1623년 서인세력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당시 이괄은 한성부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평소 불만이 있던 자들보다 자신이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는데 그치고, 아울러 자신의 아들과 동생은 논공행상에서 아예 제외되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후금의 침략이 불안한 터라 조정은 그를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하고 관서지방으로 파견하였다. 1624년 이괄은 관서지방에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느닺없이 평소 정적이였던 문회*허통*이우 등이 자신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그러나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하였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한다. 안그래도 논공행상때부터 불만이 폭발할 지경인데 이런 어..
2024.02.29 -
(1608년)광해군 즉위;대동법,중립외교정책,친형 임해군,이복동생 영창대군,인목대비,'인조반정' 쿠데타 ~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임해군은 임진란 때 가토 기요마사 덕분에 일본에도 잘 알려진 개망나니였다. 선조는 이런 개망나니 장남은 아예 없는 놈 취급하고, 광해군과 영창대군 사이에서 누굴 세자로 책봉할지 고민이였다. 장남 임해군이 개망나니였다면 영창대군은 선조가 가장 사랑했던 중전이 낳은 적자라는 점 빼면 머 대단할 것도 없었다. 어쨋든 그들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났던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나마 다행이였을 것이다. 전란 중에 파천(피난 준비)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종묘사직의 미래와 민심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해야만 했는데,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자로 삼고자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라는 물음에 신하들은 전폭..
2024.02.27 -
(1567년)선조 즉위; (1575년)동인과 서인, (1589년)정여립의 난(기축옥사), 남인과 북인, 인조반정, 광해, 1*2차 예송논쟁, 붕당정치 등.
사림파는 고려시대에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당파로써, 이들은 고려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활동하며 사회, 정치 및 문화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림파 분열의 원인은 다양한 사건이 있는데, 내부에서의 갈등이나 외부 요인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16세기 선조대에는 사림파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파벌이 갈려서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게 된다.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을 누가 맡을 것이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고, 척신을 두고 어떻게 청산할것인지에 대해 동인과 서인의 의견충돌도 있었다. 이황의 뒤를 계승한 동인은 강경론을 외쳤고, 이이를 계승한 서인은 온건론을 펼쳤다. 결국 사고방식이 맞는 자들끼리 학연,지연,지역 등으로 뭉치게 된다. 더군다나 동인은 다시 ..
2024.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