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이야기(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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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정조 즉위; 조선후기 정치문화의 중흥시대 탄생! 규장각,외규장각,초계문신제도 등.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능과 학업을 보였을 정도로 똘똘하였고,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정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통치기간 동안 여러 결정에 그 영향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영조와 정조는 모두 붕당정치의 폐단 속에서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둘 다 붕당싸움을 다스리는데 힘 쓴 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경종이 소론이 우위인 상황에서 정치를 다스렸고, 갑자기 경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맘고생이 많았다. 이때 노론이 연잉군을 지지하며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왕이 된 영조는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내세우며 ..
2024.05.07 -
(1762년)임오화변;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
탕평책을 펴서 붕당폐단을 막은 영조. 그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해준 지지세력 노론을 배제할 수 없었고, 당시 중앙에서 밀려난 소론은 경종의 급작스런 죽음과 관련하여 언제든지 영조에게 태클을 걸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1755년에 나주로 유배를 간 윤지(소론)라는 자가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하다는 벽서를 붙이자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조의 껄끄러운 일들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자 영조는 격노하였고, 노론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론을 중앙에서 모두 몰아내려 하였다. 영조는 소론을 몰아낼 생각이였는데,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자식(사도세자)인 왕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영조는 세자가 점점 못마땅해지고 노론도 왕세자에게 불안감을 갖게 된다. 또 정순왕후의 이간질도 있었고, 왕세자도..
2024.04.03 -
(1755년)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윤지의 난)을 통해 소론을 몰락 시킨 영조. 그래도 어사 박문수는 특별히 신임하였다. 윤지의 비밀결사대, 능지
영조 즉위할 당시 이에 위기를 느낀 소론의 급진세력과 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난(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고, 무신난이 진압된 뒤 또다시 윤지가 주도한 '나주괘서사건(윤지의 난)'이 얼어난다. 이것이 1755년 을해년에 발생하였기에 '을해옥사'라고도 부른다. 나주괘서사건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755년 2월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나주의 객사 망화루 벽에 익명의 괘서가 붙은 사실을 보고받는다. 괘서에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필시 무신여당의 행위라고 짐작하고 괘서의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명한다. 수사 7일만에 나주에 살던 윤지가 주모자로 체포된다. 윤지라는 ..
2024.03.31 -
(1750년)균역법 시행;수취체제의 개편,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균역법을 시행한 영조. 좋은 취지도 결국 양반지주들의 배떼기만 배불려주고 백성들의 고통만 더욱 가중되는구나 ~
조선시대, 백성들이 국가에 납부해야 할 세금으로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토지에 대한 세금 '전세', 특산물 납부 '공납', 병역의무 대신 납부해야 할 '군포'. 공납의 의무는 17세기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지만, 군역의무 대신 세금으로 납부하는 군포는 여전히 가장 큰 부담이였다. 16~60세 남자들은 군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양반계층은 군역의무 면제였지만 양인들은 관직을 사거나 호적을 위조하여 군역의 법망에서 벗어났다. 그렇지 못한 양인들은 고스란히 군역의 의무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죽은자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역이 부과되고 군역의무자가 도망간 경우에는 이웃이나 친족들에게 군역의무를 부담시켰다. 군포란 병역의무 대신 내야 했던 세금으로써, 1명당 매년 2필의 군포를 납부해야 했다..
2024.03.28 -
(1740년)경신처분,신유대훈;경종의 죽음의 의혹에서 벗어나기위한 영조의 몸부림. 옥사에 관련된 자들의 옥안을 모두 불태워라!
1722년 경종 시절에 '임인옥사'가 있었다. 이는 '삼수옥'이라고도 불리는데, 당시 노론 세력이 경종을 시해하려고 하였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노론이 크게 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또한 당시 연잉군(영조)이 관련있다는 소문이 돌아 영조도 당시 꾀 곤경에 처했었다. 이를 '임인옥사' 또는 '신임옥사'라고 하는데, 어쨋든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의 왕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종의 죽음과 무관함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영조는 즉위 후 주도세력을 소론에서 노론으로 교체했고, 노론세력이 정국을 잡자마자 임인옥사과정에서 처벌받은 노론측 신료들의 신원요구가 계속되자 '을사처분'으로 '임인옥사'를 무고함으로 규정했다. 그러다가 정미환국으로 다시 소론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처..
2024.03.26 -
(1729년)영조와 탕평파의 노력의 산물 기유처분;탕평책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기유처분. 비록 완벽하진 못했지만 양쪽의 협력과 대립을 조성하여 정국안정을 꾀하다.
'탕평'이란 임금의 정치가 치우침이 없고 당파가 없는 공정한 상태를 뜻하며, 영조는 탕평책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겪고 난 뒤, 각 붕당 모두에 역적과 충신이 있으므로 붕당을 타파하고 각 붕당의 인재를 고루 사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탕평책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유처분을 선언한 의미다. 영조는 "당습을 조정하려면 탕평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다..."라면서 탕평의 의지를 재천명했다. 그가 주창한 탕평이란 당파적 주장을 앞세우기보다는 군주권 앞에서 붕당은 타파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온건파 중심의 등용을 통한 '완론탕평'을 의미한다. 또 "경종께 충성하는 자는 나에게도 충성함이 되고, 나에게 충성하는 자는 경종께도 충성함이 되는 것이다."라며 ..
2024.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