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8. 13:43ㆍ그날의 이야기
사사오입은 4이하 숫자는 버리고, 5이상의 숫자는 그 윗자리에 1을 더해주는 수학계산법, 곧 '반올림'을 의미한다. '사사오입 개헌'은 이런 수학적 반올림 계산법을 사람과 법에 적용한 희한한 사건으로 그 주역은 이승만이다. 그는 1948년7월20일에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2년간 통치하였다. 1948년 제헌헌법이 만들어졌을 당시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었는데, 곧 대통령직을 3번이나 해먹은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다. 당시는 미국헌법을 참고해서 제헌헌법을 만들었다. 미국 초대대통령이였던 조지워싱턴은 3선이상 가능했지만 재임 후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다른 대통령들도 재임까지만 하였는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4선까지 하였다. 이후 중임만 하도록 논의된다.
미국 수정헌법 제22조...
<No person shall be elected to the office of president more to than twice...>
<누구도 2회를 초과해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더욱 대단한 건, 바로 이 사사오입 사건으로 알아 볼 수 있다. 그는 헌법 1차 중임 조항을 특수한 방법으로 자신만 제외되도록 개헌했다. 1950년에 있었던 총선에서 참패하자 1952년 규칙을 바꿔 1차 발췌개헌을 하고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헌법에는 1차 중임까지만 허용하기에 3대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1954년에 사사오입 개헌을 시도한다.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었던 것을 국민이 직접 투표하는 직선제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해서 1956년 대선에서 또 3대 대통령이 된다. 당시 그의 나이 만81세였다.
부칙)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제55조 1항의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당시 대다수 의원들은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하였다. 당시 대통령 중임제한 조항을 수정하기 위해 개헌선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했는데, 이 개헌 정족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사오입 논리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개헌선은 2/3이상을 의미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당(자유당)의 국회 의석 다수확보가 필요했기에, 자유당 후보 공천 조건으로 당선되면 개헌을 찬성하는 것이였다. 서약을 하는 사람만 공천을 주고 관권/금권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많은 자유당 후보들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조치를 취한다. 자유당은 회유와 협박으로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결국 개헌선 재적 2/3를 확보한다.
당시 국회 의석수는 203석. 이의 2/3는 135.3333...이다. 곧 기준선 135보다 커야한다. 그런데 1954년11월27일 2차 개헌안 투표를 실시해서 찬성표가 135표가 나왔다. 1표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에 국회의장단에서 부결을 선포한다. 그리고 부결이 선포된 다음날 국회의장단이 대통령에게 부결상황을 보고한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그거 반올림(사사오입)하면 정족수는 135.3333이 아니고 135가 되니 통과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날 1954년11월29일에 자유당이 다수인 국회에서 국회 의장단이 결과 번복 선포를 한다. ㅁㅊ...
이렇게 국회의장단에서 결과를 번복하니 야당의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국회는 한순간 아수라장이 된다. 반발한 야당의원들은 기분나빠하며 퇴장해버렸고, 이제 국회의사당에는 여당과 지지의원들만 남아있다. "전에 했던 부결선포는 잘못된 것이므로 이것을 통과된 것으로 수정한다"라며 동의안을 제출하고, 부결로 폐기될 뻔 했던 헌법개정안이 가결로 바뀌면서 효력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사사오입 사건은 애당초 위법이다. 일사부재의 원칙! 일사부재의 원칙은 의회에서 한번 부결된 안건은 다시 제출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다. 이러면서 동원된 수많은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통령출마 요구대회를 시작한다. 그들은 소와 말들을 끌고 나와서 시위를 했다. 여기서 신조어 '우의마의'가 만들어졌다. 또 여기에 죽은 사람의 도장을 이용해 서명받았다고 해서 '귀의'라는 신조어도 생겨난다. 이것을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자살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하여 출마요구를 수용한다. 정말 백성들이 순진무구한 시절이였다. 지금이였다면...ㅉㅉ
이 선거는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선거로 기록된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야당)이 있었지만 그 수가 너무 적었고, 결국 보수성향의 야권세력들이 민주당으로 결집한다. 민주당에서 내걸었던 선거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이 구호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자 자유당에서는 '갈아봤자 더 못산다, 구관이 명관이다'라고 맞불 구호를 외친다. 안타까운건 야당 유력 대통령 후보였떤 신익희 후보가 유세를 위해 호남지역으로 가던 기차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때가 1956년5월5일로써 선거 불과 10일전이였다.
당시 신익희 후보의 유세를 듣기위해 청중 약 23만명이 모일정도로 그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승만의 장기집권, 사사오입 개헌사건, 계속된 정치파행들이 지지도를 하락하게 했는데, 이에 기대를 가졌던 신익희 후보가 허무하게 사망하자 이에 분노한 야당 지지 청년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1956년 대선 개표결과는 이승만 후보가 5,0456,437표를 얻어 득표율69.98%를 얻고 다시 3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 대선에서 3.15부정선거가 있었고, 4*19혁명으로 하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