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6. 21:45ㆍ그날의 이야기
언제나 부정선거를 일삼아 온 이승만. 특히 3*15부정선거는 당시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와 관련된 폭력적이고 부당한 선거조작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더욱 부각시켰고, 훗날 4*19혁명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였다. 아울러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정치에 대한 욕구가 강했기에, 자신의 자유당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의 자유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선거조작을 시도하였는데, 기표소 안에 손을 잡고 들어가 표를 확인하는 3인조*9인조 투표와 투표함 바꿔치기 등을 벌였다. 또 선거 승리를 위해 유권자들에게 강압적으로 투표를 강요하거나, 부정투표와 가짜 유권자등록이 횡행하였고, 자유당 지지자들이 폭력적으로 투표소를 점거하거나 유권자들을 협박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야당 후보자들이나 그 지지자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군인들을 앞세워 폭력적으로 대응하였다. 경찰은 자유당의 지시를 받으며 군인들과 함께 강압적 방식을 동원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로 전국에서 충돌이 발생하였다. 결국 자유당 이기붕 830만표/민주당 장면 180만표로 이승만정권은 승리했다고 발표하였지만, 그 결과는 전혀 신뢰를 얻지 못했다. 야당과 국민들은 선거의 불공정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부정선거의 불공정성에 대한 불만은 대학생과 시민들에 의한 폭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부정선거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로 이어졌다. 이런 3*15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훗날 4*19혁명으로까지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부정선거에 분노하였다. 특히 학생들과 젊은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였는데, 이들은 "부정선거는 안된다!"며 거리로 나와 시위하였다. 특히 3월15일 마산에서 매우 큰 시위가 일어났는데, 경찰과 충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게다가 마산시위 도중 김주열 열사가 실종된다. 몇 일 뒤, 그의 시신이 바다에서 발견되었는데, 그의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을 주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마산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4*19일 서울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이승만은 물러나라!"고 외쳤고, 역시 경찰과 군대가 진압하려 하였지만 시민들은 더욱 강하게 저항하였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자유당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이로인해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길로 한걸음 나아갈 수있었다. 3.15부정선거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서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했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의 정치적 각성과 민주화운동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과거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들의 용기와 희생을 잊지말고, 항상 자유와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