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이야기(156)
-
(2014년)11월 중국과 FTA체결; 한중FTA 10년차,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기회'인가 '위험'인가? 중국과 손잡은 그 날 이후.
2014년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들려온 뉴스가 한국 산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과 중국, 자유무역협정 협상 타결"두 나라는 수 년에 걸친 긴 협상 끝에, 관세 장벽을 허물고 상호간에 무역을 자유화하기로 하였다. 이때문에 시장은 요동쳤고, 기업들도 새로운 판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되묻고 싶다. "과연, 그 선택은 현명했는가? 그리고 앞으로 중국이라는 대국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한국FTA는 단순한 무역협정 그 이상이였다. 당시 기준으로 중국은 한국 수출 1위 국가였고,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고 빠르게 팽창하는 경제권이였다.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우리 기업은 관세 부담없이 중국 내수시장에 직접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안한 ..
2025.07.24 -
(2013년)2월25일,박근혜 대통령취임; 세월호 침몰, 최순실 국정농단 및 박근혜 정권의 몰락...대한민국은 이렇게 무너졌다. "이게 나라냐??"
2013년2월25일, 박근혜는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 순간 수많은 국민은 '아버지 박정희의 그림자'를 벗어나 새로운 지도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권은 국가 시스템과 도덕성 모두를 붕괴시키며, 비극과 분노 속에서 몰락하였다. 박근혜의 당선은 단순히 보수층의 결집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 '강한 국가' '경제 성장' 에 대한 향수를 등에 업고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은 미래지향적인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과거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의 산물이였다. 그녀의 정치는 소통보다는 침묵, 협치보다는 '측근 정치'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리더십이 국가적 위기에서 어떤 결..
2025.07.17 -
(2012년)3월15일, 한미 FTA 발효; '자유무역'이라는 이름 아래 열린 문. 그 선택은 옳았는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대단한 기회일 수도 있어." 2006년,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FTA협상 공식으로 개시한다. 당시 정부는 '선진국형 경제구조'로 가는 디딤돌로 강조하였다. 하지만 농민단체*시민사회는 '미국식 경제 식민화'라며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국회 문턱만 넘으면 끝이야." 2007년6월, 한미 FTA 1차협상이 타결되었고, 쇠고기*자동차*지식재산권 등 대부분의 틀을 합의한다. 그러나 미국 내 정치적 반대로 비준 보류되었고, 한국 내부에서도 '졸속 협상' 논란이 지속되었다. "미국은 안 변해. 우리가 바꿔야지." 2010년, 이명박 정부는 미국 측 요청에 따라 핵심분야 재협상을 요구하였고, 미국산 자동차에 유리한 규제 완화와 쇠고기 수입 유연화 등 한국이 양보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시민사..
2025.07.12 -
(2011년)12월17일, 김정일 사망. 그날 열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미스테리와 세습의 이면.
2011년12월17일 당시 북한 수령 김정일이 과로로 사망했다. 그런데, 김정일의 사망소식은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2월19일 오전 12시에 발표된다. 북한같이 철저한 통제국가에서 최고지도자의 사망을 이틀이나 숨겼다? 이건 단순한 슬픔의 시간이 아니라 '정리'의 시간이였다. 권력 라인을 점검하고, 충성서약을 받고, 내부 숙청여부를 판단하며, 외부 반응 시뮬레이션까지 모두 마쳤다는 얘기다. 이틀 동안 북한 내부는 대외적으로 정지된 듯 침묵했지만, 실은 가장 치열한 정치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열차안에서 죽었을까? 북한은 김정일이 강행군을 하다 과로로 열차 안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열차 위치가 평양인근으로써 과연 지방 시찰중이였는지 의문이고, 철도청, 군 아무도 이동..
2025.07.11 -
(2009년)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 야당의 큰 별이 지다/체제와 독재와 운명에 대항하여 싸운 영웅.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다."
2009년8월18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이어 야당의 또 다른 큰 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노무현과 김대중은 출신도, 스타일도, 정치철학도 너무 달랐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었다. 두 분 다 "싸운 사람들"이였다. 체제와 독재와 운명에 대항하여~김대중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처음부터 조용하지 않았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대한민국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당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해외 언론들이 들끓었고, 미국과 일본이 압박하면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1980년엔 광주의 배후라며 아예 사형선고를 하였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국제사회가 지켜냈고, 결국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렇게 정치위기에서 살아남으면서, 대한민..
2025.07.02 -
(2009년)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그날, 한 사람이 스스로를 꺼내놓았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2009년5월23일, 대한민국은 한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 이른 아침,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뒷산 바위 아래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생을 다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누군가는 그걸 '자살'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난, 거기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이유없이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풍경을 보고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가족이 연이어 검찰에 불려다니는 장면을 봤고, TV속에서 '도덕성 추락'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자신의 얼굴이 깔리는 걸 봤다. 어쩌면, 그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건, 한때 함께웃고 토론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침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부엉이바위에 오르며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사..
2025.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