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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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임오화변;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
탕평책을 펴서 붕당폐단을 막은 영조. 그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해준 지지세력 노론을 배제할 수 없었고, 당시 중앙에서 밀려난 소론은 경종의 급작스런 죽음과 관련하여 언제든지 영조에게 태클을 걸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1755년에 나주로 유배를 간 윤지(소론)라는 자가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하다는 벽서를 붙이자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조의 껄끄러운 일들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자 영조는 격노하였고, 노론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론을 중앙에서 모두 몰아내려 하였다. 영조는 소론을 몰아낼 생각이였는데,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자식(사도세자)인 왕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영조는 세자가 점점 못마땅해지고 노론도 왕세자에게 불안감을 갖게 된다. 또 정순왕후의 이간질도 있었고, 왕세자도..
2024.04.03 -
(1755년)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윤지의 난)을 통해 소론을 몰락 시킨 영조. 그래도 어사 박문수는 특별히 신임하였다. 윤지의 비밀결사대, 능지
영조 즉위할 당시 이에 위기를 느낀 소론의 급진세력과 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난(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고, 무신난이 진압된 뒤 또다시 윤지가 주도한 '나주괘서사건(윤지의 난)'이 얼어난다. 이것이 1755년 을해년에 발생하였기에 '을해옥사'라고도 부른다. 나주괘서사건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755년 2월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나주의 객사 망화루 벽에 익명의 괘서가 붙은 사실을 보고받는다. 괘서에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필시 무신여당의 행위라고 짐작하고 괘서의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명한다. 수사 7일만에 나주에 살던 윤지가 주모자로 체포된다. 윤지라는 ..
2024.03.31 -
(1740년)경신처분,신유대훈;경종의 죽음의 의혹에서 벗어나기위한 영조의 몸부림. 옥사에 관련된 자들의 옥안을 모두 불태워라!
1722년 경종 시절에 '임인옥사'가 있었다. 이는 '삼수옥'이라고도 불리는데, 당시 노론 세력이 경종을 시해하려고 하였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노론이 크게 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또한 당시 연잉군(영조)이 관련있다는 소문이 돌아 영조도 당시 꾀 곤경에 처했었다. 이를 '임인옥사' 또는 '신임옥사'라고 하는데, 어쨋든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의 왕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종의 죽음과 무관함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영조는 즉위 후 주도세력을 소론에서 노론으로 교체했고, 노론세력이 정국을 잡자마자 임인옥사과정에서 처벌받은 노론측 신료들의 신원요구가 계속되자 '을사처분'으로 '임인옥사'를 무고함으로 규정했다. 그러다가 정미환국으로 다시 소론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처..
2024.03.26 -
(1727년)정미환국~보복의도가 너무 지나쳐 버림받은 노론 그리고 환국으로 다시 정계를 잡은 소론. 그러나 '이인좌의 난'과 계속된 역모로 기세를 펴지 못하였다. 탕평책도 소용없구나 ~
영조는 즉위하면서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송인명*조문명 등의 말을 들어 탕평책을 펴나간다. 그래서 을사환국으로 정국을 소론에서 노론으로 물갈이 했던 영조. 노론이 정권을 잡자 노론은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고집하였다. 탕평책을 바랬던 영조는 적당히 해야지 너무 보복에 치우쳐 대사를 그르치면 안된다며 일단 타이르고 본다. 이미 죽은 조태구, 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유봉휘를 유배했으며 이광좌와 조태억을 삭출하는 선에서 끝내야지, 노론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토적(역적토벌)을 외치며 영조를 질리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탕평을 위해 노론 탕평파를 선택한다. 노론 홍치중을 정승자리에 앉히고 정호를 영의정에 명하고 대신 좌의정 민진원과 우의정 이관명을 사직한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노론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하기..
2024.03.23 -
(1725년)영조의 탕평책;을사환국을 계기로 소론에서 노론으로 물갈이하고, 탕평책을 펴서 차별을 없애다. 임인옥사,을사처분,탕평채,탕평비,탕탕평평실,노론소론,붕당.
영조가 왕위에 올라 즉위한지 1년차. 정국은 경종때부터 여전히 소론이 주도하고 있었다. 경종때에 겪었던 신임옥사로 화를 입었던 노론들은 영조가 즉위하자 자신들에게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영조는 경종의 뒤를 이어 삼정승에 소론들로 구성하였다. 그런 한편,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이것은 노론의 재진출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경종 국상 직후 1724년 11월, 이의연이 상소를 올리면서 소론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고, 이후 이봉명을 비롯해 노론 인사들의 소론에 대한 공격상소가 계속된다. 영조는 일단 소론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이의현을 절도에 멀리 귀양보내고 소론을 대표하는 인물 김일경도 삭직하였다. 이의연과 김일경을 같이 처벌한 것은 영조가 탕평을 취하기 위한 정치운영술인 양치양해를..
2024.03.22 -
(1721년)신축환국 발생(삼사의변);경종,허수아비 왕? 그는 대의를 이루고자 이복동생을 품은 크고 위대한 왕이였다. 임인옥사,노론소론,당파싸움,조태구,대리청정,연잉군(영조),노론탄핵.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이윤. 1720년 이윤 경종(조선20대왕)이 즉위한다. 그가 재위하는 기간은 노론과 소론 당쟁의 절정기였다. 참고로 경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며, 병약하였다. 경종의 나이 34세. 아직도 슬하에 자녀가 없자 노론측에서 후사가 없으므로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압박한다. 어쩔수없이 28살의 연잉군을 왕세자로 삼는다. 이에 1721년 노론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요구하고 경종은 또 할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에 못마땅했는지, 소론에서 노론을 상대로 왕권능멸이라 하며 이를 결사반대하자 노론도 아차! 싶었는지 다시 대리청정을 거두어달라고 한다. 어쨋든 경종은 이에 관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지쳤는지 귀찮게 하지 말고 자신을 그냥 냅두라고 한다. [임금이 수답..
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