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8. 13:35ㆍ그날의 이야기
이 당시 정국은 3.15부정선거를 다시 하자는 마산학생 의거를 강제진압한 것을 시작으로, 정치폭력배들이 데모하는 고려대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4*16학생의거를 촉발했다. 매일 시위가 끊임이 없었다. 오죽하면 데모하지 말자는 피켓을 든 데모대로 등장할 정도였다. 이런 판국에 자유당과 민주당은 서로 상대당을 헐뜯기에 혈안이였고, 전라도니 경상도니 충청도니 하면서 정국이 4분5열되어 그야말로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다. 물값과 부동산가격이 치솟고 집없는 자들은 거리로 내앉아 자살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으며, 북한이 쳐들어 온다는 각 종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가진자들 중 해외로 이민가는 자들도 많았다. 심지어 육사생도들도 데모대에 합세하였다.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를 도입했지만 정권 내부의 분열과 비효율적인 정책집행으로 인해 국민적 불만이 고조되었고, 사회적 요구가 폭발하면서 경제는 침체되었고, 실업과 빈곤문제도 심각했다. 군부 역시 정치적 불안정고 무능한 정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으며, 일부 장교들은 군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했다.
이듬해 5월16일,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로 진주하여 국회의사당, 중앙청, 방송국 등을 점거하면서 군사정변이 시작된다. 이들의 병력은 제5사단, 공수부대 및 해병대, 제1여단, 6관구 사령부, 제6군단 포병 일부 대대, 그리고 제30사단의 부사단장, 작전참모, 헌병부장, 제33사단의 작전참모, 연대장 등이 수많은 병력을 끌고 서울로 진주하였다. 서울을 관할하는 제6관구의 전 사령관이였던 박정희 소장이 십수명의 장성 및 수십명의 영관급 장교들과 함께 군정을 수립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부패와 무능을 척결하고, 국가를 재건하겠다!" 쿠데타는 군*경의 커다란 저항없이 빠르게 성공했으며, 윤보선 대통령 조차도 쿠데타를 묵인할 수준이였다.
쿠데타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여 입법과 행정을 장악했고, 기존 헌법이 효력을 상실하고 새롭게 군사정권의 통치가 시작된다. 이후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며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5*16군사정변, 곧 쿠데타가 정의롭게 비춰질 순 없겠지만, 정치적 혼라을 종식하고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마찬가지로 군부독재를 초래하여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왔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