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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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영정법 실시;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니 세금이라도 줄여주자~ 1결당 4두!
장기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조선 국토가 황폐해져, 경작지의 면적인 왜란 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는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해 일부 관리들의 부정으로 인하여 국가 수입이 크게 줄어들었고, 농민생활도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삶이 궁핍해진 백성들이 도적이 되곤 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도적이 '임꺽정'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수취제도를 개선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새로 농토를 개간하고, 버려진 농토에 다시 농사를 짓게 하여 경작지를 넓혀간다. 그리고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대장'을 새로 만들어 농경지 파악에 힘썼다. 조선 전기 세종대왕 시절엔 공법을 '연분9등법(풍흉기준)'과 '전분6등법(토지비옥도기준)'을 시행하였다. 쭉~ 이렇게 시행해오다가 인조때 '영정법..
2024.03.03 -
(1608년)광해군 즉위;대동법,중립외교정책,친형 임해군,이복동생 영창대군,인목대비,'인조반정' 쿠데타 ~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임해군은 임진란 때 가토 기요마사 덕분에 일본에도 잘 알려진 개망나니였다. 선조는 이런 개망나니 장남은 아예 없는 놈 취급하고, 광해군과 영창대군 사이에서 누굴 세자로 책봉할지 고민이였다. 장남 임해군이 개망나니였다면 영창대군은 선조가 가장 사랑했던 중전이 낳은 적자라는 점 빼면 머 대단할 것도 없었다. 어쨋든 그들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났던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나마 다행이였을 것이다. 전란 중에 파천(피난 준비)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종묘사직의 미래와 민심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해야만 했는데,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자로 삼고자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라는 물음에 신하들은 전폭..
202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