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년)광해군 즉위;대동법,중립외교정책,친형 임해군,이복동생 영창대군,인목대비,'인조반정' 쿠데타 ~

2024. 2. 27. 22:1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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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임해군은 임진란 때 가토 기요마사 덕분에 일본에도 잘 알려진 개망나니였다. 선조는 이런 개망나니 장남은 아예 없는 놈 취급하고, 광해군과 영창대군 사이에서 누굴 세자로 책봉할지 고민이였다. 장남 임해군이 개망나니였다면 영창대군은 선조가 가장 사랑했던 중전이 낳은 적자라는 점 빼면 머 대단할 것도 없었다. 어쨋든 그들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났던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나마 다행이였을 것이다. 전란 중에 파천(피난 준비)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종묘사직의 미래와 민심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해야만 했는데,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자로 삼고자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라는 물음에 신하들은 전폭적으로 동의하였다. 그정도로 그의 인물됨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란 당시, 광해군은 겁장이 아비 선조와 다르게 군사를 지휘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세자가 되자마자 아비 선조와 나눠서 분조를 이끌고 도피를 하며, 평안도*강원도*함경도 등지를 오가며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들을 독려하였고 조정이 여전히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민심을 규합하고 부왕을 도와 전쟁 승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란 와중 민심이 이런 광해군에게 쏠리자 선조는 자식을 인정하기는 커녕 심한 견제와 냉대를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도망가듯 한양을 버리고 파천한 자신과 대비되게 광해군은 전쟁터를 누비며 여러 전공을 세웠으니 이런 광해군은 자식이 아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착각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그 길고 긴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 둘 사이에서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낳았다. 이후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런데 임진란을 겪은 후 더욱 내외의 신망을 쌓고 있던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기는 쉽지 않았기에 결국 광해군에게 유언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 선조가 죽고 인목왕후에게 왕위 계승 결정권이 넘어간다. 그녀는 영창대군을 즉위시킨 후 수렴청정하여는 의도도 있었지만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한글 교서를 내렸다. 이로써, 1608년 2월 2일 34세로 광해군이 조선 15대 임금에 오른다. 

즉위하자마자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잘 알기에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올리고 이항복*이항덕에게 비변사를 맡겨 국방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여 당시 군사권력을 쥐고있던 대북파와의 균형을 잡았다. 또한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로써 백성들은 과도한 공물납부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최고의 의서인 '동의보감'을 간행하여 더이상 비싼 중국산 약재가 아닌 조선의 약재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여 전란 중 공을 세우고 전사한 이들을 국가가 포상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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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대동법 ? 당시 백성들은 세금으로 곡물 등 지역 특산물을 바쳐야 했다. 대동법은 이런 것들을 대신해서 쌀로 납세를 하게 한 조세제도다. 따라서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자는 세금을 그만큼 많이 내고, 적게 가진 자는 세금을 적게 내게 되는 차등납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방납폐단을 없애기 위한 아주 파격적인 조세제도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 태조 누르하치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지방을 공격하자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임진란 때 원군을 보내 준 명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올리고 1만대군을 파견하였고, 다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광해군의 밀지를 후금에 전달하고 투항함으로써 후금과의 갈등을 피하였다. 사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군을 지원했던 명나라는 전쟁 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반대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세력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이런 국제정세를 살피고 중립외교를 펼친 덕분에 국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여러 업적이 있지만, 광해군이 여전히 성군인지 폭군인지 의견이 많은 건 업적 대비 나쁜 행실로 인한 흔적도 많기 때문이다. 그는 왕권강화에 집착한 나머지 궁궐짓기에 몰두하여 경제를 파탄나게 하였고, 측근들의 권력남용으로 정적 숙청을 빌미로 무수한 옥사가 발생하였고, 친형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이고, 계축옥사가 발생할 땐 인목왕후의 부친 김제남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사사하고, 영창대군은 당시 9세 꼬마였는데 강화도로 유배보내어 방안에 가두고 몇날 몇일 동안 장작불을 지펴 떠죽게 만들고, 나중엔 어머니뻘인 인목대비까지 폐비하여 유폐시켰고 이것은 말 그대로 패륜이기에 이를 계기로 그동안 광해군의 측근세력이였던 '북인'들마저 상당수가 등을 돌리게 된다 ... 결국 1623년 3월 서인들의 주도로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에 의해 광해군은 왕위에서 폐위된다. 

'인조반정'의 명분 :

첫째, '폐모살제'(어머니뻘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형제들을 죽였음)

둘째, 수많은 토목공사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하였음.

셋째,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하여 명을 배신하였음.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유배지에서 19년을더 살다가 1641년 7월 1일 제주도에서 6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궂은 비바람이 성 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 근심 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 나게 보았고

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가 자주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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