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왜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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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년)정미약조 체결;임신약조 폐지 이후 일본의 간청으로 새로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평화롭진 못하였다. 을묘왜변, 비변사.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삼포를 폐지했었다. 이후 일본측의 간청으로 인해 1512년에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교역을 재개하였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교역량을 상당히 축소하였다. 세견선 파견 횟수를 210척에서 60척으로 줄였을 정도로 교역 규모를 줄이고,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도 더욱 강화되고 엄격해졌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들의 불만이 상당히 불거져 왜선 20여척이 경남 통영에 있던 '사량진'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고 무력충돌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어 일본인들의 조약위반으로 골치를 앓던 조선은 결국 임신약조를 완전히 폐지하고 일본인들의 조선 왕래 자체를 금하게 된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소이전의 거듭된 통교재개 요청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찬반양론 끝에 일본 국왕사의 통교만을 허용하였다. 이..
2024.02.18 -
(1510년)삼포왜란;중종 5년, 부산*울산*창원에서 일어난 왜놈들의 폭동을 15일만에 제압하다! 부산포,염포,제포.
왜구는 일본 정규군이 아닌 해적집단이다. 조선초에도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자 세종때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였고(강경책), 한편 부산포*염포(울산)*제포(내이포/창원)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상업활동을 하도록 하였다(유화책). 세종 말년에는 왜놈들의 불법거주자가 2000명에 육박하였기에 교린정책으로 면세 등 다양한 혜택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놈들이 불법어업행위는 물론 여전히 해적질을 하며 범죄를 일삼기에 세종25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무역액을 제한하였고, 중종 때에는 그러한 혜택들을 서서히 줄여나가며 강경책을 펴기 시작했다.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그들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가하자 그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거기에다 지방관들의 무리한 요구까지 겹치면서 1510년(중종 5년)에 ..
2024.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