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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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만민공동회 개최, 최초의 독립신문;서재필박사 귀국,최초의 한글신문,전제군주제(고종)VS입헌군주제,절영도의 조차 반대, 오늘날 만민공동회_촛불집회 등.
갑신정변에 가담한 죄로 역적으로 몰리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망명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된 노동일을 하는 서재필. 이곳에서 우연히 한 미국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되며 심지어 조지 워싱턴 의대에 합격하여 의사가 된다. 그러면서 미국 시민권도 취득~ 또 조선으로 돌아오기 1년 전에는 미국인 아내와 결혼도 한다. 이 당시 서재필은 지금이야말로 조선이 개혁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귀국을 한다. 미국에서 매스컴 영향력을 겪었던 그는 조선에 와서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이때가 1896년 4월 7일. 현재 '신문의 날'이기도 하다. 서재필은 정부에 독립신문 창간 준비금과 가옥 구매비를 요구하고 제공받았는데, 그 돈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인쇄기를 들여오고, 서울 정동의 한 가옥을 사서 그곳을 독..
2024.07.19 -
(1884년)갑신정변 일어남; 3일 천하로 끝난 근대개혁의 아쉬움 ~ 새로운 세상을 꿈 꾼 젊은 그들. 아~ 조선이여!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적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아울러 조선은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다. 또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도 더욱 심해졌다. 이는 조선의 주권을 약화시켰고, 이에 따라 개화파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개화파는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려 하였으며, 사상의 정도에 따라 이들은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급진개화파는 급격한 개혁을 주장했으며, 온건개화파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하였다.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이 있다. 김옥균은 급진개화파 중심인물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하려 하였다. 박영효도 급진개화파의 중요인물로써 일본에서 유학을 ..
2024.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