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만민공동회 개최, 최초의 독립신문;서재필박사 귀국,최초의 한글신문,전제군주제(고종)VS입헌군주제,절영도의 조차 반대, 오늘날 만민공동회_촛불집회 등.

2024. 7. 19. 00:0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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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역4인방

갑신정변에 가담한 죄로 역적으로 몰리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망명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된 노동일을 하는 서재필. 이곳에서 우연히 한 미국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되며 심지어 조지 워싱턴 의대에 합격하여 의사가 된다. 그러면서 미국 시민권도 취득~ 또 조선으로 돌아오기 1년 전에는 미국인 아내와 결혼도 한다. 

서재필 박사

이 당시 서재필은 지금이야말로 조선이 개혁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귀국을 한다. 미국에서 매스컴 영향력을 겪었던 그는 조선에 와서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이때가 1896년 4월 7일. 현재 '신문의 날'이기도 하다. 서재필은 정부에 독립신문 창간 준비금과 가옥 구매비를 요구하고 제공받았는데, 그 돈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인쇄기를 들여오고, 서울 정동의 한 가옥을 사서 그곳을 독립신문사로 둔갑하여 이용한다. 독립신문에서 한글로 된 인쇄를 할 때는 한글 교정작업을 주시경 선생이 맡아서 하셨고, 당시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주시경 선생이 한글 띄어쓰기 표준을 만드는 작업을 하셨다. 

독립신문 발행본_일부

독립신문은 최초 한글신문이다. 당시 서민들 사이에 엄청 인기가 많았는데, 사람들이 일부러 유식해보이려고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니고, 각 점포마다 신문을 펴놓고 읽는 행동을 했다. 독립신문을 통해 정보가 확산되고 민중의식이 날로 성장하자 서재필은 이러한 여론을 반영한 단체를 설립할 것을 결심한다. 1890년대 서울 정동에 있던 외국인과 조선개화파 중심의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자주독립과 자유민권을 목표로 하는 근대적인 독립단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독립협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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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독립협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정부측 고위관료 안경수가 독립협회 초대회장직을 맡는다. 독립협회 멤버에는 꾀 굵직한 분들이 많은데, 그 중 이상재, 주시경, 안창호 같은 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에는 지방 지역 지회까지 생기면서 회원이 4천명에 육박한다. 독립협회 2대 회장으로는 이완용이었다. 바로 그 매국노 이완용. 하지만 짧게 하고 끝났다. 

독립협회 주역들

당시 조선은 열강의 이권침탈로 인해 이리뒹굴 저리뒹굴 한마디로 초전박살나는 분위기였는데, 독립협회는 이러한 열강들의 이권침탈에 분노하여 1898년 3월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다. 이것이 '1차 만민공동회'이다. 1만명의 민중이 모여서 러시아 '절명도조차(부산지역 땅을 외국에 빌려주는 것)'에 반대시위를 한다.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에 사람들이 후원을 하기 시작했고, 여론이 대규모로 모이자 고종도 러시아의 절명도조차 같은 요구를 거부한다. 또 러시아 통역관인 김홍륙이 고종을 암살하려다가 걸렸는데, 이에 대한 처벌법으로 다시 연좌제가 거론되었고, 연좌제로 한 사람의 죄를 가지고 그의 가족이나 친척들까지 죽이는 것에 반대하며 2차 만민공동회가 열린다. 김홍립을 처벌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가족까지 죽이는 것은 반대하는 집회였다. 

<부산>절영도 조차와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의 압력으로 고종은 일부 개혁안을 수용하였으며, 정부는 외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등 자주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만민공동회는 민중들이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종임금

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지만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추구하였다. 이때 가짜뉴스가 알려진다. 개화파 박정양을 대통령, 독립협회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임명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돈다. 고종은 거짓 소문인 것을 알면서도 이 소문이 돌았다는 이유로 독립협회 멤버들을 체포하고, 황국협회 2천여명을 투입하여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켜버린다. 그래서 1899년 12월4일 독립신문도 폐간한다. 서재필 박사는 미국으로 다시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종자를 뿌렸으니, 내가 떠난 뒤에라도 누군가 거둘 이가 있으리라..."

촛불집회_오늘날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는 조선 후기의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운동으로 민중들의 자주독립과 개혁요구를 반영한 중요한 단서이다. 이 운동은 당시의 사회*정치적 변화를 촉진하였고, 이후의 독립운동과 개혁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민공동회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권과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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