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철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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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부마항쟁; 거리로 나온 분노, 유신의 몰락! 단순한 학생들의 시위가 아닌, 시대의 외침이였고 '유신독재'를 끝내는 거대한 서막이였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정치적차원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은 무제한 연임이 가능해졌고, 국민의 권리는 철저히 억압당했다. 이때부터 언론은 통제되고, 정부에 반하는 세력은 탄압당했다. 경제적으로 성장은 했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결국 'YH사건'이 발생하여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전투경찰들의 강제진압으로 수많은 꽃들이 짓밟혔고 아울러 여성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당시 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부는 그를 국회에서 제명하였다. 결국 이 여론으로 그 불길은 부산과 마산까지 뜨겁게 달구었다. 10월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유신철폐!" "독재타..
2025.04.02 -
(1976년)3월1일, 민주구국선언문 발표;김대중 감옥살이, "역사는 기억하는 자들의 것이다!", 유신철폐, 독재반대, 명동성당, 문익환목사 등.
1976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인 3·1 민주구국선언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발표된다.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유신헌법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억압받는 등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계와 재야 인사들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76년, 3·1절을 기념하여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는 약 2,000여 명의 신자와 교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미사 후, 이우정 교수가 재야 인사 10명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한다. 선언문에는 긴급조치 철폐, 민주 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보장, 의회 정치 회..
202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