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 18:18ㆍ그날의 이야기

1972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정치적차원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은 무제한 연임이 가능해졌고, 국민의 권리는 철저히 억압당했다. 이때부터 언론은 통제되고, 정부에 반하는 세력은 탄압당했다. 경제적으로 성장은 했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결국 'YH사건'이 발생하여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전투경찰들의 강제진압으로 수많은 꽃들이 짓밟혔고 아울러 여성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당시 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부는 그를 국회에서 제명하였다. 결국 이 여론으로 그 불길은 부산과 마산까지 뜨겁게 달구었다.

10월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박정희는 물러나라!" 이렇게 학생들이 거리를 누비며 외치던 구호가 점점 더 많은 시민들에게로 울려퍼졌다. 도로 한복판의 운수업 종사자들도 경적을 울리며 지지를 보냈고, 상점 주인들도 거리로 나와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일반 직장인 및 근로자들도 하나 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부산역, 서면, 남포동 등등 밤이 깊어질수록 시위는 더욱 거세어졌고, 이에 대항하여 경찰들은 최루탄과 곤봉을 휘둘렀지만, 시민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10월18, 부산의 불길은 마산까지 번진다. 경남대, 마산대 학생들도 거리로 나섰고, 마산시민들도 적극 동참하였다. 그곳도 역시 경찰력과 충돌이 일어났고 더욱 격렬해졌으며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길거리에 최루탄 가스로 가득하여 코가 매웠고,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맞섰다. 이에 정부는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10월19일 '계엄령 선포'하였으며, 군이 투입되었다. 군대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체포되었고, 일부는 심각한 부상까지 입었다. 하지만 이럴수록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10일 뒤, "박정희 대통령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1979년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였다고 한다. 김재규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부마사태가 결정적 계기였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까지, 부마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독재도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고 행동해야 역사가 바뀐다!"
20019년, '부마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을 잊지 말고, 작금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야 한다.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라!
우리가 만드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