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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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보천보 전투;김일성의 빛나는 업적? 결론은 소련 따까리...남한과 북한의 생각차이. 남한과 북한의 처참한 증거명으로만 남은 '보천보전투'.
1930년대 초,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공산당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항일 무장조직을 형성하고 일제에 맞서 싸워오고 있었다. 이때 지도자가 바로 김일성이다. 당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겪고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일본은 한반도 내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였으며, 항일 세력은 만주를 기반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권총으로 신호탄을 쏘아올림으로써 동북항일연군 유격대는 함경남도 보천보 지역에서 경찰서와 여러 일본 통치기관들을 공격하고 불태웠다. 일본군은 즉각적으로 대응해 추격전을 벌였으나, 동북항일연군 유격대는 산악지형을 이용해 빠르게 치고 빠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
2024.09.10 -
(1911~1914년)토지조사사업 실시 및 지세령 공포;일제식민지 정책의 퍼스트 카드 ~ 경제수탈. "머지않아 조선땅은 모두 우리것이 된다!" 당시 대표적 친일파 9인(이완용,윤치호,김활란,노덕술,이근택,김갑순,배정자,민영위,방응모)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은 한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한다. 그 첫번째가 조선의 토지소유 관계를 명확히 하고 농업생산성을 높이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1918년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토지 면적, 위치, 소유권, 용도 등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토지대장을 작성한다. 토지 소유자들에게 자발적으로 토지소유를 신고하도록 했고, 입증되지 않거나 신고되지 않은 토지는 정부로 귀속시켰다. 조선의 수많은 농민들은 문맹이거나 복잡한 절차를 이해하기에 지식이 많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토지 소유권을 제대로 신고하지 못한 농민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로인해 많은 토지가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
202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