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914년)토지조사사업 실시 및 지세령 공포;일제식민지 정책의 퍼스트 카드 ~ 경제수탈. "머지않아 조선땅은 모두 우리것이 된다!" 당시 대표적 친일파 9인(이완용,윤치호,김활란,노덕술,이근택,김갑순,배정자,민영위,방응모)

2024. 8. 4. 22:3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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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은 한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한다. 그 첫번째가 조선의 토지소유 관계를 명확히 하고 농업생산성을 높이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1918년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토지 면적, 위치, 소유권, 용도 등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토지대장을 작성한다. 토지 소유자들에게 자발적으로 토지소유를 신고하도록 했고, 입증되지 않거나 신고되지 않은 토지는 정부로 귀속시켰다. 

조선의 수많은 농민들은 문맹이거나 복잡한 절차를 이해하기에 지식이 많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토지 소유권을 제대로 신고하지 못한 농민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로인해 많은 토지가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거저 넘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떠밀려가는 등 생활이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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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일제는 세금제도를 도입하여 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하였다. 1914년, 드디어 지세령이 공포되고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자신의 토지를 지키게 된 농민들도 높은 세금 부담을 지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 피폐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높은 세금과 토지수탈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농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곳곳에서 발생했으며, 이것 또한 이후의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의 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가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시행한 [토지조사사업]과 [지세령 공포]. 이 정책들은 당시까지 이어져온 조선의 전통적인 토지소유 구조를 붕괴시켰고 수많은 농민들을 몰락시켰으며, 일본의 식민지 경제수탈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정책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놈들!

 

대표적인 친일파 9인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

 

조선인들이 불안에 떨 때, 가족들과 꽃놀이 간 변절자 엘리트 '윤치호'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던 형사 '노덕술'

 

일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고 권유한 여성박사 1호 '김활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지만, 출세를 위해 나라를 팔아넘긴 '이근택'

 

친일행위로 투기를 일삼아 부자가 된 '김갑순'

 

일제 스파이로 활약하며 독립군들을 잡아들였던 '배정자'

 

일제를 등에 업고 서민들을 수탈하여 최고 갑부가 되었던 '민영휘'

 

일제 칭송 사설을 올렸던 언론재벌 '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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