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3. 18:12ㆍ그날의 이야기
벼농사 중심이였던 조선시대에서 "비"는 생존과 직결될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날씨 및 기후를 기록하였는데, 무지개와 우박, 빗물의 양까지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측우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우택법"이라 하여, 땅 속에 스며든 빗물의 양을 호미나 쟁기로 파서 얼마나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측정하였다. 각 도의 감사가 강우량을 집계하여 보고하면, 호조에서는 이것을 정기적으로 집계하여 기록하였다. 그런데 우택법은 땅이 건조하지 습한지에 따라 빗물의 스며드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어 각 지역마다 강우량 비교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위해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 좀 더 합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이런 우택법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1441년에 '측우기'가 발명되었다. 측우기는 원통형으로 된 철제통으로써 대 위에 올려놓고 비가오면 주척이라는 자를 이용해 비의 양을 잿다. 단위는 척*촌*푼으로 나뉘며 최소단위는 2mm이다.
측우기도 세종대왕 시절에 발명된 것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측우기 발명가가 역시 장영실이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세자(문종)가 고심하여 발명하였다고 한다. "비가 올 때 구리를 부어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빗물이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다"고 나와있다. 곧 자를 가지고 일정한 높이를 개념으로 재는 측우기 발명의 촉매제가 되었던 용기를 이용하여 측량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실험하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측우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세자 문종이 내고 이에 장영실이 기술적인 협조를 했을 수도 있다. 어쨋든 계속적인 연구 끝에 크기는 처음보다 조금 작아지고 공식적으로 측우기란 이름도 붙게 되었다. 계속 실험을 하여 그 신빙성이 입증되어 4개월 뒤, 측우기의 규격을 정하고 세종대왕께서 그대로 받아들여 전국적 강우량 관측망이 구성된다.
문종의 아이디어로 발명된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었고,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가스텔리가 처음으로 강우량 측정기를 발명하였으니, 우리의 측우기가 서구보다도 약 200년이나 앞선 훌륭한 기술력이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상청"에는 유일한 측우기 진품인 <금영측우기>가 남아있다. 이것은 1837년 현종때 만들어진 것으로, 삼단구조로 분리해 만든 후 하나의 원통으로 연결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밑바닥에 우량관측을 담당했던 관리의 직책이 새겨져 있어서, 이들이 교대근무를 하며 강우량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