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30. 18:17ㆍ그날의 이야기
조선시대엔 중국의 농업상식을 기반으로 조선팔도에서 농업기술이 적용되어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농업기술은 최고였지만 농업이란 모름지기 땅의 상태와 기후에 따라 적용 및 방식이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농법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현장조사에 의한 결과물이 필요했다. 조선 태종이 중국에서 번역된 농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농법을 전하였다면, 세종대왕은 중국의 기후와 풍토가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초와 변효문에게 명하여 우리 풍토에 따른 농법의 차이를 고려하여 조선 팔도를 전수조사하고, 농부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를 간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내용은 비곡(종자의 선택과 저장, 처리), 지경(논밭갈이), 종마(파종과 재배, 수확), 종도(벼 재배), 종서속(기장*조*수수 재배), 종직(피의 재배), 종대두소두(콩/팥/녹두 재배), 종맥(보리*밀 재배), 종호마(참깨), 종교맥(메밀) 이렇게 10항목으로 나누고, 먼저 종자와 토양 다루기를 설명하고, 각론에서는 작물들의 재배법을 서술하였다. 농업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토지조성이나 건널목 만들기, 씨앗의 선택과 보존, 작물심기와 관리, 병해충예방과 대처법 등 실용적인 조언과 지침을 제공한다. 또한 토양의 특성과 관리 및 작물의 성장과 생리, 날씨와 계절변화에 따른 관리법 등 우리 땅의 특성을 살펴 과학적이고 체계화 된 지식을 제공한다.
농사직설에서 '이앙법'이 처음 소개되었다. 당시에는 남부지역의 일분에서만 이앙법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직파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앙법은 물의 의존도가 높기는 하지만, 직파법보다는 수확량이 훨씬 컷기에 백성들은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세종대왕은 농업기술을 증진시키기 위해 직접 경복궁 북쪽 언덕에서 농사를 지어보기도 하였다. [농사직설]이 정초와 변효문이 저자이기는 하지만 오롯이 그들만의 업적이라고 할 순 없다. 실질적으로 농사를 발전시키려 했던 국왕 세종부터 중앙의 관료,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 그리고 노농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이뤄낸 결과물이다.
[농사직설]이 중요한 농서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실정에 맞는 최초의 농법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자주적 농법서라는 점에서 농업기술의 변천사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이다. 정초와 변효문 등이 편찬한 후 관찬(정부에서 편찬한 책)으로 간행하여 이듬해 각 도의 감사와 주*부*군*현 및 경중의 2품 이상에게 널리 나눠 주었다. 백성들도 자국의 실정에 맞는 농법서가 나왔다는 것에 기뻐하였다. 그러나 책이 온통 한자로 씌여졌기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 관리들이 읽고 농부들에게 설명하여 책의 내용을 전하였다.
농사직설은 이후의 많은 농법서에 영향을 주었다. 농사직설이 기본이 되어 후에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에 인용되었다. 1492년(성종23년)에는 내사본으로 왕실에서 반포하고, 1656년(효종7년)에는 [농가집성]에 포함하여 10행본으로 간행하고, 1686년(숙종12년)에는 '숭정본'으로 각각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