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30. 17:32ㆍ그날의 이야기
1973년 한국군까지 모두 철수하고, 그 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베트남은 통일되었고 베트남전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동맹국 중에서는 단연 한국군이 가장 용맹하였고 가장 잘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따른 피해와 희생도 만만치 않았고 또 동맹국 중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던 만큼 그 중 소수로 인한 만행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그 당시의 상황과 연유를 잘 살펴야 한다. 무엇이든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우리 참전용사들이 입은 피해는 상당히 엄청났다. 참전용사 대략 32만5천여명. 이 중 사망자 5066명 / 부상자 11232명 / 고엽제 피해자 7만948명 /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자 10만여명,,,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피해도 상당할 것이다. 명분없는 전쟁에서 조국의 관심사는 오로지 파월군인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뿐이였다. 정부는 파월장병들에게 수당 중 80%를 고국에 송금하도록 했다.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월남에는 뭐하러 왔나?"
"사병은 죽으러 왔고, 하사관은 고생하러 왔꼬, 장교는 돈벌러 왔다."
"쫄병들은 전선에서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서 있는데, 지휘관들은 텐트 쳐놓고 아이스박스에 좋은 거 담가놓고, 고급장교들은 냉장고에서 맥주꺼내 마시고 선풍기 틀면서 1~2년 보내고 1년에 3~4천달러씩 되는 거금을 챙기고 돌아갔다."
참고로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소득은 156달러였다.
또 사병들이 전방에서 죽음과 싸우는 동안 일부 장교들은 돈을 위해 뛰었는데, 그것이 군수품을 빼돌리거나 심지어 밀수에 손을 데기까지 그들에겐 베트남전은 전쟁터이자 '기회의 땅' 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한국군 먹으라고 준 쇠고기는 중간에 사라지고 비스킷 몇 조각만이 사병들에게 하달되었겠는가? 부대장들은 아예 팔아먹고 그랬다. 들켜봤자, 같은 장교끼리인데 서로 봐주기 식이였다. 그런데, 당시엔 이런 짓도 안하면 바보였다. 시대가 그랬기에... 참고로. 우리나라 5공화국 주축인물들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등이 모두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고위 장교들이였다.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이들은 고국으로 귀국해서도 서로를 밀어주며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을 만들어 똘똘 뭉쳤던 것이다.
한국군이 모두 철수한 직후 파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이 기자회견에서 "한국군 포로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단 한명의 포로도 실종자도 없는 전쟁... 하지만 바로 그날 사이공의 한국대사관은 북베트남으로부터 한국군 포로 1명을 송환하겠다는 통보를 받는다. 말과 현실이 맞지 않는 사태가 이러니, 결국 국방부는 포로가 아닌 '실종자'로 처리하기 위해 부랴부랴 꼼수를 펼친다. 그 한명의 포로는, 월맹군과의 최대혈전을 치뤘던 72년4월 안케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11개월간 잡혀있었던 맹호사단 소속 유종철 일병이였다. 그는 송환되어 졸지에 민간인 신분이 되어 귀국한다. 늦은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만세 ~~~~"를 외쳤다. 하지만 가족들은 공항에 나오지 못했고 그는 곧장 군병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사실 그는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아서 이미 전사 처리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군은 단 한명의 실종자나 포로를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종철의 사고는 그의 묘지를 철거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고, 그의 호적엔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문구가 새겨지게 되었다. 국방부는 결국 뒤늦게 나마 재조사를 벌였고, 그제서야 실종자가 총 8명 있었음을 발표하게 된다.
박정환 소위는 '구정공세' 당시 베트콩한테 납치된 뒤 북베트남으로 북송되던 중 캄보디아로 탈출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환하였다. 하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 역시 '전사자'로 처리되어 있었고 그의 병적기록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 포로들이 이렇게 증언하였다.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중에 한국군을 봤습니다. 건강해 보였고 전투복에 미제 전투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자신들은 곧 죽게 될 거라 그러더군요. 왜냐면 월맹군은 한국군이라면 결코 살려두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이 외에도 이제서야 알려진 한국군 포로는 더 있었다. 포로들이 탈출하다 잡히면 어떻게 될까. 73년 송환되었던 유종철씨가 말한다. "내가 탈출하다 잡혔었습니다. 그때 정말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우더니 몇 일동안 그대로 굶깁니다. 대소변은 그냥 그 상태로 싸야만 했죠." 68년에 탈출을 시도했던 박정환씨도 말한다. "탈출해도 주변이 전부 베트콩들이니깐 그냥 다시 잡힙니다. 붙잡히면 가혹한 고문이 가해지는데 이때 저는 뜻밖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북한으로 가라는 것이였습니다. 여기에 있으면 어차피 미군 폭격에 의해서 죽든 어쨋든 다 죽게 되어 있고, 정전이 되어도 너네는 미군의 용병이기 때문에 너희와는 포로협상도 없으니, 그러니 남한으로는 절대 갈 수 없고 그때가 되면 너희는 모두 죽으니까, 북한에 가면 살수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사실 베트남전에는 북한군이 암암리에 참여하고 있었다. 때문에 포로가 귀순의사만 밝히면 쉽게 북한군에 넘겨줄 수 있었다. 실제로 간부 한 명과 사병 한 명이 북한의 선전용 대남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재향군인회는 파월한국군 6명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밝혔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
1. 타이빈 양민학살 사건 : 1966년2월 맹호부대원들이 베트남 빈딘 성의 타이빈 마을에서 작전 수행 중 한 동료가 타이빈 마을 여성과의 문제로 다툼을 벌이다 주민들에 의해 사망한다. 이에 부대원들(맹호부대)이 마을주민 120여명을 학살하였다.
2. 고자이 양민학살 사건 : 1966년2월26일, 맹호부대원들이 빈딘 성의 떠이선현 고자이 마을 주민 380여명을 대량학살 사건이다.
3. 빈호아사 커우 마을 민간인학살사건 : 1966년12월6일, 한국해병대가 비호아사 커우 마을에서 민간인 131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 베트남 방문 시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4. 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 : 1968년2월12일, 한국해병대가 베트남 디옌반현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 70여명을 죽인 전쟁 범죄이다.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2004년6월 한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외에도 알려진 민간인 학살사건이 14건 더 있다. 이 중 한국군 만행만 8건인데,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도 있나보다. 베트남 민간단체가 발표한 것은 한국군 총 23건, 미군 총 17건 이라는 미확인 보도도 있다.
'민간인 학살'이라고 해서 무조건 적으로 한국군을 악마화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비록 사건 자체는 매우 잔인했겠지만,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든가 혹은 우연치않게 이럴수밖에 없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을 것이다. 내 추측이다. 전쟁중에 민간인 속에 베트콩 간첩을 식별하는 것도 쉽지않고, 민간인이지만 무기를 소지하고서 한국군을 위협했을 수도 있다. 전쟁 중 민간인들에게 잘 대해주고 함께 정을 나눈 곳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베트콩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눈이 뒤집혀 재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어쩔수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군이 잘못했음은 분명하다. 결과적으론... 저런 만행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임은 분명하다. 우리 역시 베트남 입장이라면, 사과를 해도 용서해줄까 말까 일테지...
고엽제란, 초목을 고사시키는 제초제다. 농약의 용도상 분류에서 낙엽제에 해당하는 것을 속칭하는데, 흔히 미국군이 베트남전쟁 당시 밀림에 다량 살포한 2*4*5-T계와 2*4-D계를 혼합한 제초제를 고엽제라고 한다. 화학적 불순물인 다이옥신이 포함되어 있는데 치사량이 0.15g, 청산가리의 10,000배 수준의 강한 독성물질이다. 베트남에 산과 초원이 많아 전쟁이 힘드니까 미군이 화학성무기로 사용하였다. 근데 그 순간 그곳에 함께 참전한 동맹국들도 있었는데, 우리 한국군도 그곳에 여기 저기 있었다. 그들의 몸에 이것이 뿌려졌으니, 이것을 흡입하거나 노출된 자들은 몸 속에서 분해되지 않고 축적되어 10~20년 후 암, 기형아, 피부질환 등으로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또한 독성이 강한 탓에 2세*3세에게 까지 유전될 가능성도 있다. 2024년 법개정으로 추가된 고엽제후유증 질병 목록이 있다.
고엽제 후유증 보상금은 등급에 따라 매월 568,000원~3,506,000원(수당제외) 받을 수 있다. 장애6급이상은 유족 승계가능하고, 대중교통 할인 지원 및 위탁은행을 통한 대부지원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