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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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그리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거칠것 없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지만,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나날이 거세게 펼쳐졌다.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의병들이 나날이 거병하는 것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전국의 의병을 약 3만8000명으로 집계하였고, 그 중 1만7000여명이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전라도 지역은 해당 지역 출신의 의병들이 많았고 또 전라남도 지역은 아직 철도와 도로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다 산악지역이 많아 의병활동이 활발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였다. 일제는 호남지역 의병을 강제병합의 마지막 장애물로 판단하고 대규모 정규군을 동원해 이를 제거하려 남한 대토벌 작전을 펼친다.그리하여 1909년 9월부터 정규군 2개 연대와 ..
2024.07.28 -
(1904년)러일전쟁 발생, 한일의정서;동아시아의 패권균형의 변화, 일본의 조선식민지화, 만주지역 패권, 뤼순전투, 쓰시마해전, 포츠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영향력 확장을 위해 경쟁하는 구도였다. 두 나라는 특히 조선과 만주지역에서 패권을 두고 종종 갈등을 빚었었다. 당시 중국은 의화단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열강에 선전포고를 한 의화단은 1901년 베이징 의정서를 결과물로 진압되었다. 이 결과 일본은 베이징에 군대를 주둔할 권리를 얻고 배상금도 지불받게 된다. 한편 러시아는 만주지역 철도가 의화단에게 공격당하는 문제로 만주를 점령하게 되는데, 청조와 협의한 것과 다르게 퇴각하지 않는다. 이에 러시아와 일본은 4차례에 걸쳐 교섭을 하였다. 러시아는 만주지역의 자국의 배타적 권리를 보장받고 조선의 북부 중립화를 원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이 독점적 영향력을 조선에서 행사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4.07.23 -
(1895년)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아관파천,러일전쟁,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고립,대한제국 선포 등.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일본군과 친일 세력에 의해 명성황후(민비)가 시해된 사건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고, 조선정부는 일본의 압력 아래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개혁과정에서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한다. 결국 조선 내부에서 친일파와 친러파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고, 명성황후는 친러파를 지지하며 일본의 간섭에 저항하였다. 또 당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경제개혁은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본의 경제적 착취가 더 심해졌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였다. 일본군과 낭인들은 건청궁에 침입해 ..
2024.07.16 -
(1885년)톈진조약, 한성조약, 영국의 거문도 불법점령;나날이 위축해지는 조선의 주권. 결국 국제 외교정세에서 조차 초라해지다...
19세기 후반엔 조선과 관련된 여러 조약과 사건들이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톈진조약은 갑신정변(1884년)이후 조선에서의 양국의 군사적 개입을 규제하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가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근대화하려고 시도했지만 3일만에 끝나버리고,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내정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조정하기 위해 조약이 필요하였고 1885년 톄진조약이 체결된다. 톈진조약의 주요내용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한다. 만약 조선에 군대를 다시 파견할 경우 서로에게 미리 통보하고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2024.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