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0. 22:01ㆍ그날의 이야기
19세기 후반엔 조선과 관련된 여러 조약과 사건들이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톈진조약은 갑신정변(1884년)이후 조선에서의 양국의 군사적 개입을 규제하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가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근대화하려고 시도했지만 3일만에 끝나버리고,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내정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조정하기 위해 조약이 필요하였고 1885년 톄진조약이 체결된다.
톈진조약의 주요내용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한다. 만약 조선에 군대를 다시 파견할 경우 서로에게 미리 통보하고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강하게 지속되었고 조선의 주권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양국의 조선에 대한 경쟁 또한 심화되었기에 결국 톄진조약은 청일전쟁의 전초전으로 작용하였다.
또 같은 해 체결된 '한성조약'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공사관이 공격받았기에 이에 따른 보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체결되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고,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개입하며 일본의 요구를 조정하려 하였다. 일본은 한성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할 기회를 마련한다.
1885년 4월, 영국 해군이 조선의 동의없이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 간의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세력다툼이 심했는데,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통해 아시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고,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가 중요한 해상 요충지라 여기며 러시아가 이곳을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선제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조선의 허락없이 영국의 불법점령은 조선과 청나라, 러시아는 물론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이런 국제적 압력과 협상 끝에 영국은 1887년 2월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이 국제정세에서 외교적 주체로 취약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었고, 조선의 자주권 또한 위협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위 세 가지 사건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톈진조약과 한성조약은 조선의 내정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을 심화시켰고, 영국의 거문도 불법점령은 국제적외교에서 조선의 취약한 위치를 드러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선이 근대적 변화와 국제정세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치욕스런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