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그리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2024. 7. 28. 22:32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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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거칠것 없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지만,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나날이 거세게 펼쳐졌다.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의병들이 나날이 거병하는 것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전국의 의병을 약 3만8000명으로 집계하였고, 그 중 1만7000여명이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전라도 지역은 해당 지역 출신의 의병들이 많았고 또 전라남도 지역은 아직 철도와 도로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다 산악지역이 많아 의병활동이 활발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였다. 일제는 호남지역 의병을 강제병합의 마지막 장애물로 판단하고 대규모 정규군을 동원해 이를 제거하려 남한 대토벌 작전을 펼친다.

그리하여 1909년 9월부터 정규군 2개 연대와 헌병과 경찰, 조선인 밀정 등을 의병진압에 동원한다. 그 결과 의병장 100여명이 체포되었고, 의병 4천여명이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포로가 된 자들은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는데 해남에서 하동에 이르는 국도2호선에 해당하는 일부 구간의 기본 골격이 당시 노역에 징발된 의병들이 건설한 것이며, 일제는 이곳을 '폭도 도로'라고 불렀다. 9월에서 10월에 걸친 일제의 이런 토벌작전으로 인해 의병활동 자체가 사그라들었고, 결국 광복이 될 때까지도 대규모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나질 못했다. 대토벌작전은 의병활동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으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고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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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통감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 체결과 한일합방의 주도적인 인물이였다. 일본의 정치가로서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침략에 앞장서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주요인물로 평가되지만, 우리에겐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할 결심을 한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히토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저격 직후 안중근 의사는 체포되었고,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결국 처형된다. 하지만 그의 저항정신은 수많은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더욱 불타게 하였다. 안중근의 이토히로부미 저격사건은 한국인들에게 큰 자부심과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러 일으켰다.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 큰 자부심과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러 일으켰고,  그 후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일본의 핵심인물을 제거하여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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