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7. 23:13ㆍ그날의 이야기
1차 왕자의 난때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한 대장군 박포. 그는 이방원에게 있어서는 많은 공이 있었지만,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결국 박포는 이방원으로부터 등을 돌려 이방원을 쓰러뜨릴만한 세력을 물색한다. 그때 대권에 노골적으로 야욕을 보이는 이방간에게 접근하게 된다. 당시 이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하려 했던 병권집중운동을 이어받아 다른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박포는 이것을 두고 이방원이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오해하게 만든다.
"정안공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방차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쳐야 할 것입니다."
이방간은 정종에게 아뢰어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제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려 합니다. 청하건데,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이에 정종은 크게 노하여 방간에게 철군을 명하였다. 그러나 방간은 "정안공이 신을 해치려 하니,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라며 거절하고, 군사를 이끌고 개성 동대문으로 향한다. (당시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안정을 찾아가던 1400년 1월.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과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진짜 군사까지 동원하여 골육상쟁인 제2차 왕자의 난을 벌인다. 선죽교에서 이방간과 이방원이 대치한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이미 권력의 실세인 방원을 지지하고 있었고, 개성 한복판에서 형제간에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지만 결국 이방원의 승리로 끝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1차 왕자의 난과는 다르게 실질적인 장남 정종이 왕위에 올라있는 상황이라 이방간에겐 사실 난을 일으킬만한 명분이 없었고, 애당초 이방원이 이방간의 행적을 쫓아 이미 계획을 짜고 만반의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방원의 사병들이 이방간 세력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고 승기를 잡게 된다.
승기를 잡은 이방원은 이로써 세자 자리를 확보하게 되고, 패한 이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당한다. 세치 혀로 뒤에서 난을 일으킬 명분을 제공했던 박포는 유배된 뒤 사형을 당한다. 이방원이 왕위(태종)에 오른 후에도 신하들은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듣질 않았다. 회안대군 이방간은 세종 때인 1421년까지 유배지(황해도 토산) 촌장으로 살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은 대부분의 이복형제들을 가차없이 처단했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끝없는 주청에 못이겨 바로 윗 형인 이방간만은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던 것이다.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반대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이방원의 정치적 입지 또한 더욱 굳건해진다. 이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 이성계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로써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이 등극한다. 형 정종은 상왕,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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