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중종반정;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 중종을 왕위에 앉히다! 박원종, 성희안, 장녹수(장희빈), 월산대군 등.

2024. 1. 22. 22:25그날의 이야기

반응형

 

갑자사화까지 승승장구하던 연산군. 그는 그 후로 계속해서 흥청망청 쓰느라 정신없었고, 1000여명의 기생들을 궁에 들여 향락에 취했으며, 기생들중에 비빈을 뽑아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사림파는 여전히 숨죽이고 있고, 훈구파의 남은 세력들은 여전히 눈치보며 사림파의 잔챙이들을 어떻게 삶아먹을까 궁리만 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져도 누구하나 간청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연산군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연산군의 미인선발대회

박원종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의 누이가 성종의 형 이정의 부인이다. 곧 그 누이가 성종에게 형수이고 연산군에게는 큰어머니다. 누이의 배경때문인지 박원종은 성종 때 과거도 거치지 않고 무관이 되어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물론 사헌부와 사간권에서 크게 반발하긴 했었다. 하지만 성종은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어부쳤는데, 이에 영의정과 우의정까지 공론을 모아 반대하니 결국 임명을 철회했다. 다시 박원종에게 공조참의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오늘날로 치면 각 부처의 국장급이다. 물론 많은 대신들이 이것도 아니라고 비판했으나 이번엔 성종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어부쳤다. 연산군 시절, 박원종이 강원도 감사로 임명되었을 때, 바로 강원도로 떠나지 않고 성 밖의 기생집에서 하루 묵으며 창녀를 끼고 놀았다. 이를 두고 사헌부에서 크게 비판하였으나 연산군은 박원종을 끝까지 비호하고 벌을 내리지 않았다. 성종때부터 참으로 잘나가고 승승장구하는 박원종이다! 

그중 장녹수가 으뜸이였다~

박원종의 누이는 남편 월산대군(성종의 형)이 35세에 죽어 일찍 과부가 되었다. 이에 연산군은 어린 원자 이황을 돌봐주는 명목으로 궁궐출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에대한 답례로 푸짐한 상을 거하게 내리기도 하였다. 애 좀 봐주는 것 치곤 너무 지나치다 느낄정도의 후하게 말이다. 그런데 사실 뭔가 이유가 있었다. 연산군은 큰어머니 박씨를 궁궐에서 몇일씩 머무르게 하고는 간통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족보상으로는 큰어머니지만 연산군이 침을 흘릴 정도로 박씨의 미모가 꾀 출중했나보다. 어느날 박씨와 동침하고 자는데 꿈에 박씨의 남편이자 큰아버지 월산군이 나타나 진노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큰아버지 월산군의 무덤에 쇠막대기를 꽂게 했는데 그때 무덤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어쨋든 연산군이 큰어머니 박씨를 겁탈했다는 소문이 조용히 내시와 궁녀들 사이에 소문이 나고 있었고 결국 박원종의 귀에까지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듣고 박원종은 누이 박씨에게 "왜 참고 삽니까? 차라리 약이라도 먹어 자결하시지요!"[중종실록 5년 4월 17일]라며 분노를 표출하였다. 누이 박씨는 결국 연산군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이에 약을 먹어 자결하였다. 연산군은 결국 인륜을 저버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박원종은 쿠데타 계획을 세운다.

박원종과 한 마을에 사는 성희안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과에 근무하며 교리(정5품)까지 올랐다. 시강관과 시독관이 되어 연산군을 가르치고 간언을 올리기도 했었으며, 무오사화때는 죄인을 추궁하는 추관으로 왕의 편에 섰고 그 공으로 품계도 올랐다. 후에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예조참의*형조참판을 거쳐 43세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참판은 종2품으로 인사를 다루는 핵심부서로써 임금의 신임을 받아야 오를 수 있다. 이런 성희안과 박원종이 반정을 계획하면서 나눈 대화를 보면 반정의 명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반응형

"정치가 혼란스럽고 가혹해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종묘사직은 무너질 것이다. 대신들은 임금의 명을 따를 뿐이고, 누구 하나 나라를 안정시킬 이 없구나. 우리들은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어찌 차마 앉아서 지켜만 볼 것인가? 하늘과 백성은 새로운 인물을 바라고 있다. 사직을 바로잡아야 한다." 

 

반정이 발생하기 일주일 전 연산은 장녹수와 전비를 데리고 앉아 느닷없이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태평한지 이미 오래니 어찌 불의의 변이야 있게냐마는, 만일 있게 되면 너희도 무사하긴 어려울 것이다." 라며 함께 눈물들을 흘렸다. 이때 박원종, 성희안과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무장 신윤무가 합석하여 동지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무오사화의 주연 유자광에게도 권했고, 문무와 지략을 갖춘인물 이장곤이 유배지에서 탈출하였고, 전라도에 유배된 유빈등이 거사를 결의한 격문을 보내왔으며, 경상도에선 조윤손과 윤탕로가 거병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박원종과 성희안 등 반정세력은 신수근과 임사홍을 제거하고 밤11~새벽1시에 창덕궁에서 못미쳐 진을 쳤다. 이에 소문을 듣고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연산군에게 사신을 보내 권한다.

"옥새를 내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냐? 내 죄가 중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대로 하라!"

이렇게 해서 연산군을 폐하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옹립하였다.(1506년 9월 2 일)

장녹수와 전비 등은 군기시 앞에서 베었는데, 분노한 군중이 몰려와 돌과 기왓장을 던져 순식간에 돌무덤을 이루었다. 세자 황은 조정의 기대를 받았는데, 유배된 후 사사되고 부인 신씨만 살았다. 연산군은 왕자신분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안치된 후 두달여만에 죽었다. 그가 죽기전 마지막 했던 유언은 "아내(부인 신씨)가 보고싶다" 였다. 강화도에 묻혔다가 부인 신씨의 간곡한 청에 따라 방학동의 현 위치로 이장되었는데, 훗날 부인 신씨도 곁에 함께 묻힘으로써 그의 유언은 이루어졌다. 

연산군 유배지 교동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