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년)삼포왜란;중종 5년, 부산*울산*창원에서 일어난 왜놈들의 폭동을 15일만에 제압하다! 부산포,염포,제포.

2024. 1. 24. 21:41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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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는 일본 정규군이 아닌 해적집단이다. 조선초에도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자 세종때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였고(강경책), 한편 부산포*염포(울산)*제포(내이포/창원)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상업활동을 하도록 하였다(유화책). 세종 말년에는 왜놈들의 불법거주자가 2000명에 육박하였기에 교린정책으로 면세 등 다양한 혜택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놈들이 불법어업행위는 물론 여전히 해적질을 하며 범죄를 일삼기에 세종25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무역액을 제한하였고, 중종 때에는 그러한 혜택들을 서서히 줄여나가며 강경책을 펴기 시작했다.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그들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가하자 그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거기에다 지방관들의 무리한 요구까지 겹치면서 1510년(중종 5년)에 폭동이 일어난다.

제포에 거주하는 왜놈들 우두머리 오바리시와 야스고 등이 대마도주의 아들 종성홍을 대장으로 추대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제일 먼저 부산포를 공격하고 부산진첨사 이우증을 살해한다. 약탈 및 학살을 자행하고 웅천성, 동래성까지 침공하였다. 곧바로 조선 정부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15일만에 제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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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으로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295호가 불에 타 소실되었고, 왜놈들은 왜선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살되었는데, 참수된 왜놈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서 그 뒤 입국하는 왜인들에게 위구심을 갖게 하였다. 삼포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 간의 교통이 중단되었으나, 일본측에선 곧바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폭동을 주도한 우두머리의 머리를 바치는 등 여러 교역재개를 위해 노력하였다. 일본이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제포(내이포)만 다시 개항하였다. 

중종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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