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년)갑자사화 발생;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사망사건. 연산군 결국 복수하기로 결심하다 ~ !

2024. 1. 20. 22:18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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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를 겪은 후 조정엔 이렇다 저렇다 할만한 인재가 드물어지고, 조정도 제 기능을 발휘하질 못했다. 그저 폭군의 눈치만보는 간신배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빌빌대는 것이 전부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연산군은 자신의 위치를 더욱 곤고히 하려 하였다. 국가 재정이 엉망이기에 공물 수량을 늘리고 공신들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 하였다. 이에 훈구파가 크게 발발하고 일어났다. 이때 외척 임사홍이 등장한다. 그의 간교한 성격때문에 크게 출세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지내다가, 연산군이 훈구파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는 사이에 때맞춰 등장한 것이다. 그는 훈구파와 사림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함께 계획을 도모하였으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고하였다. 

폐비 윤씨는 부왕 성종의 후궁으로 첫번째 왕비가 자식없이 사망하여 이 윤씨가 중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산군을 낳았다. 그런데 윤씨는 성정이 매우 독하고 질투심이 강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비상'이라는 독약을 구하러 다닐 정도로 고약하기도 하였다. 윤씨는 자신과 세자를 해치려한다는 모의하는 글을 쓰고서 후궁들에게 누명을 씌우기도 하였고,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손톱자국까지 만들었다. 또 중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파다하자 처소를 뒤져 좋지 않은 행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인수대비(성종 할머니)가 진노하며 윤씨를 폐위시키게 된다. 폐위까지 된 윤씨가 매우 측은했던 성종은 궁녀를 시켜 지켜보게 하였는데, 인수대비는 그 궁녀를 시켜 임금께 거짓을 고하게 하였다. 그래서 궁녀는 성종에게 윤씨가 여전히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식으로 보고하였는데, 이에 결국 윤씨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후 인수대비는 늘 진성대군만을 아꼈고, 폐비 윤씨 뒤를 이어 중전이 된 저연왕후 역시 연산군에게 별 관심이 없었기에 연산군은 궁에서 외롭게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인지, 연산군은 성격이 괴팍하게 자랐고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발로 차버리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스승들은 가차없이 쫓아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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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폐비윤씨에 관하여 그간 모두 듣게 되었고, 한참 고민을 하고 난 뒤 결국 복수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폐비윤씨 사건에 관련된 자들은 훈구파든 사림파든 가리지 않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윤필상,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김승경, 이세좌, 권주, 이극균, 성준은 12지간으로 지목되어 극형에 처했고, 이들 중 이미 죽은자는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하였다. 이세좌는 본인뿐 아니라 가문까지 거의 몰살될 지경이였고, 홍귀달은 교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훈구파를 제거한 임사홍은 이 여세를 몰아 사림파에도 탄압을 가했는데, 사림파가 국사를 비방했다고 무고해 폐비윤씨 사건과 동일한 범주로 엮으려 하였다. 이 결과 이전 무오사화에서 유배령이 내려진 박한주, 이수공, 강백진, 이총, 최부, 이원, 김굉필, 이주, 강겸 등이 유배지에서 사형되었다. 무오사화에 이어 갑자사화까지 겪은 사림파는 한동안 중앙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갑자사화 이후 폭군 연산군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라의 재물을 모두 탕진하였으며 여기저기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이에 살아남은 훈구파들이 연산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성종의 둘째인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 참고로 연산군의 '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경우 붙게된다. 연산군, 광해군...모두 왕위에서 쫓겨나서 '-군'이라 불린 것이다. 무덤 역시 '릉'이 아닌 '묘'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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