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무오사화 발생;성군에서 폭군으로 돌변한 연산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키다 ~ 훈구파의 간계, 사림파의 몰락.

2024. 1. 19. 17:52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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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_무오사화

 

연산군이 집권하던 조선전기 사회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는 시기였다. 훈구파는 조선을 세운 일등공신의 후예들이였고 세조때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세력들이며, 사림파는 역성혁명에 반하여 지방에 은거한 자들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결성된 세력들이다. 이런 배경으로 두 세력은 사상이 완전 달랐으며 서로 앙숙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처음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모두가 인정하는 성군과도 같은 존재였다. 부왕 성종때에 있었던 퇴폐풍조를 없애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데 열중하기도 했다. 각 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해 내었고,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며 열의 넘치는 중신들을 기용하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던 과거제도 뿐만 아니라 별시 문과를 실시하여 33명의 신하를 뽑는 등 개혁을 단행했고, 국조보감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원래부터 학문적인 일에는 뜻이 없었다. 특히 사림파 출신들이 학문을 강요하였는데 그들의 잔소리가 늘 고역이었다. 

어느날 사초를 정리하던 이극돈이라는 당상관이 사초를 정리하던 중 김일손의 사초를 발견한다. 사초란 역사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을 말하며, 넓은 의미로는 실록편찬의 모든 자료가 사초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림파는 언론직과 사관직을 차지하면서 훈구파 신하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일이 많았으며, 더 나아가 연산군의 향락적인 생활을 비판하기까지 하였다. 어느날 훈구파의 이극돈이라는 자가 왕실에 상(정희왕후)이 났을 때 기생들과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극돈의 ㅇ러한 비행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이극돈이 해당 내용을 지워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김일손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분한 이극돈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삼아 연산군에게 보고하게 된다. 이때 김종직과 웬수지간인 유자광을 찾아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함께 실어서 상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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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항우가 의제였던 초희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에 오른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항우에게 죽음을 맞게 된 초나라 희왕의 명복을 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곧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꼬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지금의 왕인 연산군의 왕위의 타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선조인 세조를 능멸한다며 김종직의 제자들을 능지처참하게 처형하였고, 이와 관련된 사림파 수백명이 귀양길에 보내졌다. 또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서 부관참시의 형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참고로, 사초는 본래 임금도 못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는 이를 어기고 자신들의 반대파인 사림파(영남학파)를 제거하기 위해 사초를 연산군에게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쨋든 이 사건의 빌미를 만든 이극돈은 도리어 파면당했고, 유자광만이 김종직에게 품었던 원한을 갚은 셈이 되고 끝났다. 

이 무오사화 이후로 더이상 그 어떤 신하고 연산군에게 학문을 권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감언이설만 하는 관리들만 넘쳐났고 연산군은 이제서야 자신의 세상이 왔다며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수백명의 기생들을 뽑아 매일 궁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양반집 규수든 대감집 마누라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들면 서슴없이 취하였다. 또한 성균관을 없애버리고 그 기관을 기생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소제도도 폐기시켜버렸다. 더욱이 기가 차는 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도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령을 내렸으며, 매일 흥청망청 놀기만 하였으니 국가재정도 바닥이 났다. 공신들에게 주었던 공신전(공신들에게 내려주던 토지)을 도로 빼앗고, 관리들의 재산의 반을 갈취하기도 하였다. 참~~ 아주 나라를 제대로 말아드신 대단한 왕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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