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 19:49ㆍ그날의 이야기
조선후기인 1811년(순조11년)에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은 조선 후기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만이 폭증한 사건으로, 민중의 권리와 평등사회에 대한 열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1800년대에 들어서 조선은 세도정치가 이루어져 나라가 혼란스러운데다 자연재해 및 전염병까지 빈번하여 농민들이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여전히 노론계파가 권력을 독점하고 부패한 정치를 이어갔다. 이는 지방 사회의 불만을 고조시켰는데, 특히 평안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중앙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적었기에 차별을 많이 받았다. 무거운 세금과 고리대는 농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고, 평안도 지역은 상업이 발달했으나 중앙정부의 규제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고초가 더욱 컷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상업 억제정책은 평안도의 상인과 중소지주들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또한 지역 전반적으로 양반과 상민, 노비 간의 계층 갈등이 심화되었다.
1811년 12월, 당시 몰락양반층이였던 홍경래와 그의 동지들은 천주교와 동학의 영향을 받아 평등사회 건설을 주장하며 평안도 가산에서 반란을 시작하였다. 평안도 지역의 상인, 향리, 무사 및 농민들을 연합 봉기하여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가산, 선천, 정주 등 주요도시를 신속하게 점령해 나갔고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중앙정부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결국, 조선 정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다. 1812년 5월, 난을 일으킨 세력들은 정주성에서 100일만에 패배한다. 홍경래는 정주성 함락 후 최후를 맞이하였고, 그의 동지들도 대부분 처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정치의 부패와 세도정치의 폐해를 드러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후일 개혁의 필요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반란 이후 평안도 지역에 대한 통제와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지만, 반란의 원인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고, 사회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반란의 여파로 인해 평안도 지역의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지만, 장기적으로는 상업발전과 경제개혁의 필요성 또한 재기되었다. 비록 난은 실패하였지만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조선 정부에 저항하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후에 발생하는 농민봉기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반란주모자인 홍경래는 본관이 남양이며 용강 출생이다. 1798년 사마시에 낙방한 뒤, 조정에서 평안도 출신의 배척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횡포로 시국을 개탄하고 과거보기를 단념하게 된다. 1800년 박천의 청룡사에서 명문의 서자인 우군칙을 만나 시국을 논하던 중 서로 의기투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만주의 마적단 두목 정시수와 거부 이희저를 포섭하고 가산 다복동을 거사의 본거지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