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 20:55ㆍ그날의 이야기
19세기 초, 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많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특히 무역적자가 심각했으며, 청나라의 은 수요로 인해 영국은 막대한 양의 은을 수출해야 했다. 이러한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 조건을 개선하려 하였다. 1816년 8월, 영국사절단이 청나라에 도착했다. 사절단은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청나라의 전통적인 예법(고두례 및 머리조아리기 등)을 교구받았지만 이를 거부했으며 결국 이로인해 다시 외교적 갈등을 겪게된다. 결국 사절단은 황제 면담에 실패했고 큰 성과없이 청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이것은 결국 제1차 아편전쟁(1839~1842년)의 배경 중 하나로 작용한다.
로드 암허스트호 사건은 청나라와 영국 간의 외교적 갈등과 무역 문제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아편전쟁과 불평등 조약 체결 등으로 이어지며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이제 영국 동인도회사에서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쳐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한다. 이에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2년 2월 27일 중국 광동을 출발하여 6월 21일 황해도 몽금포 해안에 나타났다가, 남하하여 충청도 홍주 고대도 뒷 바다에서 20여일간 정박한다. 이때 이들은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전달해 줄 것과 통상조약을 체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지금까지 봐 왔던 서양선들과는 달리 통상을 요구해오는 이들에게 조선 정부는 각별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황제의 허락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 이게 당시 조선의 현실이였으므로... 이에 순조에게 장계를 올린 귀츨라프의 항해기 내용이 언급된다. "조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 민족이라 하지만, 협박과 상처를 입더라도 침략자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민족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처음 조선인을 면담할 때부터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 점인데, 그들이 겁이 많으며 무엇이든 강하게 요구하면 불평없이 굴복한다는 나의 선입관을 입증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냉담한 감정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지만, 악의없는 외국인을 겉으로 원수같이 대접할 때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타고난 감정을 없앨수 없기 때문입니다." 귀츨라프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사건과 쇄국정책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입견이 컷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선입관과는 달리 조선인들이 매우 용감하고 인정이 많다는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반청을 목표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효명세자는 전담특사로 홍희근을 재파견하여 통상을 맺을 것을 허락하였으며, 이들을 외국 특사로써 고대도에 임시 상주할 것을 허락하였다. 7월 21일, 확답을 받은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4년 영국으로 귀국하여 조선국의 답신과 하사품을 전달한 뒤 추가적인 교류 특사들을 파견할 것을 결의한다. 그리고 1835년 8월에 조선을 재방문하여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