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5. 22:50ㆍ그날의 이야기
기해사옥과 병오사옥.. 모두 조선 후기의 주요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이 사건들은 천주교의 전파와 함께 조선사회 내에서 발생한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변화를 보여준다.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었고, 사회 각계 각층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나날이 증가하는 현상에 그들이 조상 제사마저 거부한다는 등의 이유로 유교적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였다.
헌종이 즉위한 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강화되었고, 이들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결국 1839년 두 번째 카톨릭교도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 신부 모방, 샤스탕, 앵베르를 비롯하여 약70여명의 교도가 죽임을 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헌종은 척사윤음( 斥邪綸音)을 내리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하여 카톨릭교를 더욱 탄압하였다. 이 사건을 기해사옥이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은 계속 비밀리에 유지되었고, 점차 확산되었다.
*척사윤음 : 신도들의 폐해사례를 들어 이를 배척하기 위해 내린 윤음. 특정 종교 신자 가운데 풍속을 해치는 사람이 있음을 염려하여 척사귀정의 요지로써 내린 윤음.
*오가작통법 :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 국가가 촌락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만든 인보자치조직법을 의미한다.
1846년(헌종 12년)에 발생한 병오사옥 역시 또 다른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기해사옥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고, 병오사옥은 이러한 연속성에서 발생한 결과다. 이 당시 조선에는 제 3대 교구장인 주교 페레올이 들어와 한국인 최초 신부 김대건과 함게 포교에 힘쓰고 있었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중국 마카오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고 교세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천주교가 사학이 아님을 주장하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세계의 정세를 알려 정부당국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병오사옥 이후에도 천주교는 계속 확산되었고, 결국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함께 잡혀있던 교인들 중 현석문, 임치백, 한이형, 남경문, 우술림, 김임이, 정철염도 사형에 처해졌고, 1925년 이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이들은 로마 교황에 의하여 복자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