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31. 09:33ㆍ그날의 이야기
1801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른다. 순조가 아직 어리기에 정순대비가 섭정을 하게 되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남인을 약화시키고 노론벽파를 강화하려 금압령을 내린다. 당시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창 전도를 하고 다니던 조선 최초 신학자 이승훈. 그로 인하여 일반 백성은 물론 정약용, 정약전 등 조선 양반가문 상당수가 세례를 받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엔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도 있었다.
황사영은 정조1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처가의 영향으로 천주교인이 되었다. 1801년 어린 순조를 대리청정하던 정순대비가 금압령을 내리자 이때부터 천주교탄압이 심하게 가해지기 시작하였고, 황사영은 자신이 가입한 명도회로 피신해 여러 방책을 도모하고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은 백서를 중국 북경에 머물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서가 관헌에게 발각되어 9월 29일 체포되고 말았다. 이 밀서를 '황사영 백서'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더욱 가혹해졌고,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1791년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 탄압사건 '신해박해'. 당시 정조시절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시파를 우대하였기에 큰 탄압은 없었지만,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반대로 벽파가 득세하면서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해 대탄압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 남인학자와 청나라신부 주문모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형에 처해졌고, 이로인해 시파세력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고 실학이 퇴조된다.
이 당시 정약전이 유배되어 간 곳은 흑산도인데,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자산어보'도 이때를 배경으로 제작된 것이다. 정약용 역시 유배기간 동안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을 집필하면서 큰 형 정약전에게 많은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해양생물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바다의 어류(227종) 및 폐류*조류 등을 관찰하며 배웠는데, 이 당시 그가 저술한 책이 그 유명한 [자산어보]다. 우리나라 최초 해양생물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두번의 유배를 당하였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날 때 둘은 나주 율정점에서 서로 헤어졌다. 정약전은 유배생활 내내 아우를 걱정하고 그리워했다고 한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풀려난다는 소식을 듣고 정약전은 자신의 처음 유배지인 우이도로 다시 나갔다. 아우가 한 번 더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걱정해 그는 거기서 3년 더 아우를 기다리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실학의 거두로 알려진 형제들의 이름만큼 그들의 형제애도 남달랐음을 느끼게 한다.
신유사옥으로 천주교를 너무 가혹하게 탄압했음을 느꼈는지, 조선 조정에서도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심각해질 것을 염려하여 [황사영의 백서]에서 불리한 대목을 모두 고쳐 명주천에 다시 써서 동지사 겸 진주사로 하여금 북경의 청제에게 보고하여 양해를 구하였다. 백서의 원본은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다가 '갑오경장' 뒤에 발견되어 조선 천주교회의 주교인 뮈텔이 소유하고 있다가 1925년 로마 교황에게 건네져 현재는 로마교황청에서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