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30. 21:20ㆍ그날의 이야기
정조대왕은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백성들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수원에 화성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94년 2월부터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는데, 성곽전체 길이는 5.74km이고 높이는 4~6m의 성벽으로써 130ha의 면적을 에워사고 있다.
기록과는 다르게 여러 사견에 의하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세력들 대부분이 한양 4대문 안에 살면서 많은 권리과 기득권을 누리다보니 역대 왕들이 이들에 대한 견제를 제대로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양 인근에 신도시를 하나 만들어서 집권세력들에게 집중된 권리들을 분사시켜 왕권강화를 노리고 계획한 것도 있으리라.
조선시대는 당최 전쟁과는 먼 나라였다. 당시 청나라는 건륭제 이래로 중원에 안착하였고, 일본 애도막부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문치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상비군인 5군영의 군권은 모두 노론 세력이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의 부친을 죽인 원수들인 노론세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소론과 남인계를 중용했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재야인물에 가까워서 중앙정부에 기반이 없었다. 이에 정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또 자신만의 정치 및 군사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수원화성을 축조하였다고 본다.
오늘날 수원화성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곽으로 손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수원화성의 빈틈없는 구조와 아름다움을 완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당시 거중기와 녹로 ~
거중기는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해서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올리는 도구다. 수원화성의 축조과정을 모두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실제 거중기 높이가 약 3.6m정도였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들어올릴때는 평행을 유지하기 위해 좌우에 얼레를 돌리는 힘을 고르게 똑같은 속도로 감아 올렸다. 한 대의 거중기에 30여명의 성인이 7.2톤이나 되는 돌을 들어 올릴수 있다고 한다. 1인당 무려 240kg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 성능이 우수했고, 화성 축조시간을 단축하는데 대단한 일조를 하였다.
녹로는 도르레 원리를 이용해 돌을 약 10m 높이로 들어 올리던 장비였다. 수원 화성 축조 당시엔 녹로 2대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정약용이 도르레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화성 축조에 도입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녹로는 1803년 창덕궁 인정전 재건공사, 1857년 인정전 중수공사 때에도 사용하였다. 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리기 힘든 무거운 돌도 성곽의 높은 곳까지 옮길 수 있다.
수원화성은 성곽둘레길이가 5.7km로써 축조하는데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거중기와 녹로 등 당시 첨단장비를 개발 도입해서 2년 9개월만에 완성한 것이다. 정약용 할아버지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