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운요호사건 일어남;통상을 빌미로 한 왜의 도발 그리고 조선과 왜의 충돌 ~ 불평등조약 체결.

2024. 6. 29. 20:28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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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까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외교통상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던 조선. 이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추진하며 서구 열강의 방식에 따라 주변국과의 교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게 개항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의 운요호는 1875년 9월 18일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조선으로 향한다. 운요호는 항해연습과 수로측량을 주업무로 했다고 한다. 9월 20일, 운요호가 조선의 영해인 강화도 주변 해역에 도달하였고, 조선은 운요호가 무단으로 영해를 침범했다고 판단하고 경고 사격을 가한다. 운요호는 조선의 경고사격에 대응하여 강화도의 초지진을 포격하였고, 상륙하여 결국 교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로 인해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뻔뻔하게도 일본은 조선 정부에 강하게 항의하며 오히려 책임을 물었고, 조선의 개항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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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 26일, 결국 조선은 일본과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으로써, 부산*원산*인천 등 3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서구열강과의 교류가 확대되었고, 저들과의 교류를 통해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개화파와 보수파 간의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선의 행사에 개입하게 된다. 이는 결국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국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강화도조약

운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또한 조선이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와 외교적 대응 능력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에도 잘 싸웠던 조선군은 운요호사건때도 응당 합당한 대응을 한 것이였으나, 지금까지 국력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조선은 별수없이 근대화로 무장된 일본의 요구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나름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의미부여를 하지만 결국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이 시작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조선은 진즉 쇄국정책을 멈추고, 정치 경제 시스템을 개혁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개혁을 하면 기존 기득권자들은 손익을 따져 자신들이 손해볼 것을 아까워 해 대부분의 개혁을 반대해왔다. 운요호 사건 이후에는? 역시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대에도 개혁을 하려고 하면 모든 기득권자들이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지금은 강남좌파라 불리는, 기득권자들 중에도 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쩝 ~

초지대교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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