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8. 15:50ㆍ그날의 이야기
최익현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저항운동가다. 고종10년에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고 고종이 직접 정치할 것을 요청한 '계유상소'를 올린다. 그동안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으며 여러 개혁정치 및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대부분 강압적이였으며 많은 반발을 초래하였다.
계유상소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흥선대원군의 과도한 권력집중과 전횡을 비판하고 그가 권력을 내려놓고 퇴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고종이 더이상 대원군에게 의존하지 않고 왕 답게 직접 정치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이 스스로 통치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조정 관리들의 부패와 무능을 하소연하고, 부정부패와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다. 아울러, 유교통치 원칙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유상소 이후, 고종은 대원군의 권력을 제한하고 그를 실각시켰다. 최익현은 이 상소로 인해 충직한 신하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고 사회에서 그의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최익현은 여러 중책을 맡았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결국 일본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계유상소는 조선말기 정치 상황을 반영한 중요한 문서로써, 흥선대원군의 과도한 권력집중과 전횡을 비판하고 고종히 친정할 것을 밀어주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이후 조선의 정치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유교적 정치사상을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다. 훗날 안중근 의사는 "실로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중국의 위안스카이는 "굴원과 개자추를 합친 절의"라고 격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