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갑신정변 일어남; 3일 천하로 끝난 근대개혁의 아쉬움 ~ 새로운 세상을 꿈 꾼 젊은 그들. 아~ 조선이여!

2024. 7. 7. 23:0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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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조선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적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아울러 조선은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다. 또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도 더욱 심해졌다. 이는 조선의 주권을 약화시켰고, 이에 따라 개화파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개화파는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려 하였으며, 사상의 정도에 따라 이들은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급진개화파는 급격한 개혁을 주장했으며, 온건개화파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하였다.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이 있다. 김옥균은 급진개화파 중심인물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하려 하였다. 박영효도 급진개화파의 중요인물로써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개혁을 추진하였다. 서광범은 김옥균과 함께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홍영식은 급진개화파 인물로써, 조선의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한 최초 인물이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축하연에서 민씨 척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들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보호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개화정책을 발표하며 개혁을 추진하여 하였다. 그리고 정변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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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 성공한 후, 이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신분제 폐지, 과거제도 개혁, 군제 개편 등을 시도하였다. 뜻이 좋았고 추진력도 좋았으며 정변에 성공한 후 당장 필요한 개혁을 시도한 것도 좋았다. 그러나 청나라가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파견하여 정변을 진압하였으며, 이에 따라 갑신정변은 3일만에 끝나게 된다. 성공한 듯 하였으나 결국 3일천하로 마감하게 된 아쉬운 정변이랄 수 있다. 

갑신정변이 끝나고 김옥균, 박영효 등 주요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후 조선 내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된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더욱 깊게 간섭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청나라의 영향력에 밀려 한동안 소극적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운동은 한동안 위축되었으며, 개화파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이후의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큰 개혁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의 근대적 변화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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