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조미수호조규 체결, 임오군란 발생;슈펠트제독의 노력,이홍장,조선최초의 사관학교 설립,민씨정권 몰락과 복귀,청의 내정간섭,제물포조약,군제개혁의 필요성 부각.

2024. 7. 2. 08:21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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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고 조선과 일본의 개항이 시작되었다. 이후 서구열강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는데, 당시 미국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조선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것 또한 강화도조약 못지 않게 불평등조약과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조선과 미국 간의 상호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관을 설치한다. 조선은 미국과의 무역을 허용하고, 양국 상인들의 자유로운 교역을 보장했다. 미국인은 조선에서 미국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 조선의 사법 관할권에서 벗어나되, 양국은 상호 공정한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고 서로에게 최혜국 대우를 제공하기로 한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그리고 여기엔 1880년부터 조선과 청나라, 일본 3국을 오가며 순방외교로 노력하였던 슈펠트 제독의 역할이 컷다. 

조미수호조규 체결 이후,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도 유사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은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근대개혁을 추진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또한 불평등조약으로서 조선의 주권을 일정 부분 침해하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에 대해 각국의 반응이 모두 달랐는데, 먼저 당사국인 미국은 자국 상품 및 고등인력의 수출시장으로서의 가능성이 커졌고 동아시아 무역확대로 연안에서 발생하는 난파선 및 선원에 대한 구조를 조선과 협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일본과 함께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어 청국의 이익에 부합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조선에서의 국익차원에서 기존의 청국과 일본보다 우위로 올라서게 된다. 

청국은 이 조약을 굉장한 외교적 승리로 간주하였다. 이홍장은 이 조약으로 인해 청의 대조선종주권이 더욱 강화되고 한반도에서 일본의 세력이 견제될 뿐 아니라, 미국과 협력하여 조선에 대한 열강의 침략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일본은 불만이 많았다.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조회문에서 선언한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구절로 6년전에 맺은 조일수호조규는 결국 중국의 속방인 조선과 맺은 것으로 '조약'이 아닌 '조규'로 격하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조미수호조약은 조선이나 이홍장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효과는 미비했다. 조선이 어려울 때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중립 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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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조약으로 인해 청국의 종주권에서 탈피하여 친미노선이 이어졌고, 청의 상업적 특권을 부정한 최혜국 대우 조항을오 조미간 무역이 확대되었다. 또한 미국문화가 조선 국내로 들여져 와 사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군사면에서도 미국군사교관 초빙과 국내최초 사관학교(지금의 논산 연무공원)설치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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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계층차별과 불합리한 사회시스템으로 인해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었고, 특히 세도정치의 부패와 양반층의 특권 반대로 백성들의 생활고 등이 매우 심각하였다. 조선의 군인들 또한 낮은 급여와 부당한 대우로 불만이 컷으며, 특히 임오년에 지급된 군량미의 질이 매우 나빴던 탓에 군인들의 반발도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들로 1882년 7월 23일 서울에서 군인들의 폭동이 시작된다. 임오군란! 그들은 궐기하여 도성을 공격하고 민씨 척족과 정부 관료들을 목표로 삼았다. 군란으로 인해 민씨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고, 민비(명성황후)와 척족들이 권력에서 물러나게 된다. 조선 정부는 부득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청나라의 원조로 민씨 정권이 복귀하게 되고, 청나라의 내정간섭도 심해진다. 이후 군제개혁을 추진하여 군인들의 대우를 개선하였고, 근대적 군사제도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임오군란은 겪은 조선정부는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허용하게 되고, 결국 조선의 외교적 입지에 큰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조미수호조규 및 임오군란은 조선의 개방과 근대화과정에서 발생한 조선 후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조미수호조규 체결은 조선이 서구 열강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임오군란은 사회적 불만과 군제개혁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사건이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선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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