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4. 19:40ㆍ그날의 이야기
1868년 5월, 독일 상인이였던 오페르트(Ernest Jakob Oppert)가 조선과의 교역을 성사시키기 위해 조선 정부를 협박할 수 있는 수단으로, 당시 조선에서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도굴하여 이를 협상카드로 사용하려 하였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 페롱과 함께 필립핀*중국*유럽*미국 등 여러나라의 무장한 선원들을 동원하여 충남 덕산에 있는 남연군 묘를 도굴시도. 그러나 묘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석회로 관을 둘러 놓은 상태였고, 도굴 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도굴에 실패하고 퇴각하게 된다. 이 사건은 서구 열강의 침탈 시도와 조선의 국권수호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당시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군관 100여명을 투입해 도굴꾼들을 추적했으나 실패했고,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남연군 묘를 파헤친 건 무례한 짓이지만, 백성을 해치는 것보단 나은 일이며 도굴에 성공해 관을 가지고 올 수 있었으나 지나친 것 같아 그러지 않았다....."라며 조선의 문호개방을 재차 요구함과 동시에 거부할 경우 재침략할 뜻을 시사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원인으로 우선적으로 흥선대원군의 꽉 막힌 '쇄국정책'에 있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교역 확대를 위해 여러 침탈 시도를 벌였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교역이 성사되지 않자 오페르트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조선과의 교역을 모색하고, 결국 극단적으로 이런 방식을 통해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서구 열강은 조선의 폐쇄적 정책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으며, 조선은 외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꽉 막힌 세대간의 갈등처럼 뉘앙스가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론 열강의 침탈이 빈번했던 시기에 쇄국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외세의 간섭을 차단하고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위한 최선이자 노력이였다. 당시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약소국이였던 조선이 서구 열강들에게 치여 살아남기 위한 최종적 선택이였을 것이다. 또한 이는 서구 열강의 침탈 시도와 조선의 자주권 수호의지 사이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