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간도참변,훈춘사건;홍범도장군,김좌진장군,만주지역 무장투쟁,북간도,백운평전투,어랑촌전투,일제의 만행,잔인한 학살 등.

2024. 8. 20. 16:39그날의 이야기

반응형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간도참변, 훈춘사건은 모두 192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시기에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들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한국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과 일본군의 보복이 얽힌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다.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으로 많은 독립군이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만주지역에서 독립군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추진하는데, 1919년8월 이후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서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1920년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이때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였고, 다음날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직접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선다. 이에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를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이 봉오동전투는 만주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지형을 활용한 유격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으며, 이 전투는 일본의 만주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후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 그는 어릴 때 서당공부를 하고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에 다녔을 뿐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문무를 겸비해 19세에 한성신보 신문사의 이사가 되었고, 애국계몽단체 서북학회 교육기관인 오성학교의 교감을 맡았다. 이후 그는 기울고 있는 나라를 교육이나 언론이 아니라 무력으로 구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한다. 이를 위한 자금모집을 하다가 일본순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6개월간 옥살이도 한다. 그후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북간도로 건나간 후 [대한독립서명서]에 서명하고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이 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부의 명칭을 북로군정서로 바꾸어 총사령관이 되고, 임시정부 지원금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한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계획하고, 1920년10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한다. 김좌진 장군은 이때 일본군과 두만강상류 청산리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때 홍범도 장군과 연합해 일본군 12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세계 전쟁사상 유례없는 압도적인 승리를 올린다. 독립군은 일본의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유격전술과 지형을 잘 활용해 일본군에 맞섰고, 주요전투로는 백운평전투, 어랑촌전투 등이 있으며 특히 백운평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위대한 승리가 바로 '청산리대첩'이다.

반응형

전투에 패하고 철수하는 일본군 사진

이후 약소민족 독립을 원조한다는 당시 소련정부의 선전에 북간도를 떠나 시베리아 땅으로 갔다가 다시 간도로 되돌아온다. 김좌진 장군은 이후 교포사회 통합을 전개하였으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에 의해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다. 청산리대첩은 봉오동전투와 더불어 독립군이 일본군에 승리한 최대의 승리 중 하나로, 일본군 만주 장악 계획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독립군의 전투력과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건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훈춘사건은 일본이 만주에서 독립군 탄압을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1920년 10월, 일본은 중국 동북부 훈춘지역에서 자신들이 조선인 독립군으로 위장한 이들이 중국 군경을 공격했다고 주장하고, 이 사건을 빌미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여 독립군과 민간인을 탄압한다. 훈춘사건은 일본이 독립군 탄압을 대외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이후 독립군의 활동에 큰 제약을 가져왔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은 만주지역에서의 독립군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고, 이는 간도참변과도 연결된다. 

훈춘사건 당시

청산리 대첩에서 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보복을 위해 만주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한인 민간인들이 대규모 학살 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1920년 10월말부터 11월까지 간도지방의 한인 동포 1만여명을 살해하고, 2천5백호의 민가와 30여개의 학교를 불태우는 등 그야말로 한인사회를 초토화시켰다. 경신대참변을 계기로 대부분의 무장단체는 와해되었으며, 다수의 무장대원들이 러시아로 이동을 준비하였다. 간도참변은 일제의 잔혹함을 드러낸 사건으로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을 보여주었고,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재조직과 대응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간도참변

간도참변 목격담. "10월31일, 연기가 자욱하게 낀 찬랍파위 마을에 가 보았다. 사흘 전 새벽에 무장한 일개 대대가 이 기독교마을을 포위하고 남자라면 늙은이, 어린이를 막론하고 끌어내어 때려죽였고, 죽지 않으면 불타고 있는 집과 짚더미에 던져 함께 타 죽게 하였다. 이 상황을 울지도 못하고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들의 아내와 어머니들 가운데는 땅바닥을 긁어 손톱이 휜 사람도 있었다. 3일을 태워도 다 타지 못한 잿더미속에서 한 노인의 시체가 나왔는데 몸에 총구멍이 세군데나 있고 몸은 이미 타서 목이 새 모가지만큼 붙어 있었다. 또 반만 탄 19채의 집 주위를 차례로 돌아보니 할머니와 며느리들이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살덩어리와 부서진 뼈를 줍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나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나는 잿더미 속에서 시체를 하나 끌어내어 뿔뿔이 흩어진 팔 다리를 제자리에 주워 모은 다음 사진을 찍었다. 어찌나 분하던지 사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 네번이나 다시 찍었다..." -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