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제암리 학살사건;3*1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2007년 '아사히 신문'을 통해 공개된 우쓰노미야의 '그날의 일기', 스코필드 박사와 언더우드 선교사.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저항정신!

2024. 8. 8. 22:3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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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글에서는 '3*1독립운동' 전후의 배경과 사건에 대해 소개했었다. 이번에는 3*1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사건을 다루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일본의 폭압적 통치에 맞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중요한 사건이였다. 경기도 지역에서도 물론이고, 제암리와 그 인근 지역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 3*1운동에 대한 일본군과 헌병의 반응은 매우 강경하였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일본군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협조한 마을을 표적으로 삼아 잔혹한 보복을 가하였다. 이때 제암리도 일본군의 타겟이 되었으며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당시 화성지역 주민들은 송산면, 장안면, 우정면 등에서 만세시위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기록에 의하면 약 1000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고 한다. 시위대는 일제통치하의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아주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1919년 4월 15일, 시위대가 모임을 해산한 뒤 일상으로 돌아간 틈을 노려 일본군 헌병대는 제암리 주민들을 마을 교회와 민가로 강제로 집합시킨다. 그렇게 주민들을 건물 안에 가둔 뒤, 건물에 불을 질렀다.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하려하는 주민들은 미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총격을 받아 쓰러졌고, 안에 있으나 밖으로 나오나 죽음을 피할 길은 없었다. 이 학살로 제암리 마을 주민 30여명이 잔혹하게 살해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어린아이와 여성들이였다는게 충격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팔탄면 고주리로 이동해 일가족 6명을 만세시위 주동자로 몰아 사살하였다. 30여채의 민가는 물론 교회까지 불태웠다. 인근의 수촌리에서도 유사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곳에서는 40여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마을은 불 타 폐허가 되었고 생존자들은 공포심과 함께 삶의 고통을 지녀야만 했다. 

일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조선 백성들이 알아서 기기를 바랬겠지만, 오히려 이런 사건들은 일제의 잔혹성을 다시금 일개워주는 계기가 되었고, 백성들의 독립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들로 인해 독립운동의 중요성과 절박함을 인식시키며, 더욱 많은 백성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또한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으며, 미국과 영국 등의 서구 언론은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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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와 미국 영사관 직원들은 참변 다음날(1919년4월16)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제암리로 가서 현장에 도착해 싸늘한 주검이 된 주민들과 불에 탄 집터 등을 목격했다. 그들은 현장에 있던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참상을 확인했고, 이후 영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Schofield F. W.) 도 현장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들은 비극적인 제암리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생존자 증언 등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내어 결국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계 여론에 보도되자, 결국 일본기독교동맹은 뒤늦게 대표단을 파견해 사건조사를 실시하였고,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며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19년 7월, 드디어 현장을 지휘했던 일본의 아리다 중위가 군법회의에 넘겨졌지만... 그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2007년 2월, 일본 '아사히 신문'을 통해 제암리 학살사건과 관련된 당시 [일기]가 공개된다. 이 일기는 사건 당시 일제의 조선군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쓴 것이다. 기록에는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간단하지만, 학살과 방화를 자인하게 돼 제국에 불이익이 올 것이다...간부와 협의해 (민간인들이)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과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라고 적혀있다. 

우쓰노미야 다로.. 당시 일본군 사령관

[제임리 학살사건]은 오늘날에도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이 겪은 고난과 일본 제국주주의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제암리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화성시에서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설립되어, 당시의 비극과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매년 희생자 추모제 등을 개최해 학살사건의 아픔을 달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이 겪은 잔혹한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기록이 되며,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저항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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