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자유시 참변, 조선어연구회;독립군부대 간의 허탈한 쟁탈전,러시아 적군의 힘을 빌려 반대파 제거?...홍범도장군,주시경선생,말모이,우리말큰사전 등.

2024. 8. 23. 22:32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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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이후, 수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로 이주해 무장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압박을 피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러시아로 이동한 독립군부대는 대부분 사회주의 계열이였다. 이들 가운데에도 파벌이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러시아 적군의 힘을 빌려 반대파를 제거하고 독립군부대의 지휘권을 강탈하려 한 자들도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벌어진 사건이 '자유시참변'이다. 

러시아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는 한국 독립군을 지원하며 무장시키고 훈련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 '자유시(현재 '스보보드니')'에 집결하였다. 이때는 독립군 내부에서 저들끼리의 사상의 차이 그리고 볼셰비키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한참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특히 일부 독립군 부대는 소비에트의 통제 받는 걸 거부하였고, 결국 1921년 6월 당시 소련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시도하는 와중 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 당시 홍범도 부대도 자유시 인근에 있었으나 참변에 참가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이동휘와 함께 레닌을 만나 참변의 실상을 알리고 감금되었던 독립군 부대원들을 석방시키려고 노력을 하였다.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수백 명의 독립군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력이 약화되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다. 독립운동의 내부 분열과 외부세력의 개입이 가져 온 비극적 결과를 보여준다. 이후 생존한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가거나 중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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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어(조선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어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억압하였고 자신들의 일본어를 배우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맞서 한국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지식인들이 모여 조선어연구회를 결성한 것이다. 

조선어연구회

참고로, 조선어연구회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우리말과 글의 연구, 통일, 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에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민간학술단체에서 시작한다. 국어연구회는 '조선언문회'로 변경하였고, 1913년 '한글모'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감시로 사라졌다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다시 되살아 난 것이다. 그 후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인 학자들을 모아 똑같은 이름의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자, '조선어학회'로 바꾸고, 1949년 10월 2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2008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주시경 선생

'조선어연구회'는 체계적인 연구를 목표로 한글정리와 표준화 작업에 힘썼으며, 한국어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정리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한국어의 연구와 교육을 위한 교재를 출판하였고, 잡지나 서적을 통해 한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한글]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한글보급에 기여하였다. 

'조선어학회'의 당시를 다룬 한국영화 <말모이>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많은 회원들이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검거되고 투옥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망한 회원들도 있었지만,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주요 학자들이 석방되면서 조직을 재건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조선말 큰사전' 사업을 재개한다. 그리고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이 간행되었고, 1957년에 총 6권으로 완간되었으며, 현재는 [우리말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고 있다.  

우리말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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