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한국독립운동지혈사,회사령철폐,산미증식계획 실시,진주 소년회;백암 박은식,소파 방정환,어린이날 지정,어린이잡지,'어린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

2024. 8. 21. 13:28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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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박은식 초상화

1920년, 박은식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라는 일제강점기의 한국 독립운동사를 기록한 책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상하이 유신사에서 간행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사건들, 인물들 그리고 독립운동의 경과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독립운동의 정신을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근대적 역사 서술 방식에 의하여 쓰인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사 개설서로 <한국통사>와 더불어 민족주의사학이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과거 1910년에 일제는 '회사령'을 공포하여 한국에서의 기업 설립을 엄격히 통제해왔다. 한국인들이 기업을 설립하려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이는 한국인들의 경제적활동을 크게 제한한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회사설립은 까다롭게 하고 일본인의 회사설립은 대부분 허가해주었는데, 이 때문에 조선의 경제 대부분이 일본인이나 친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식민지 경제를 일본자본이 장악한 이상 회사령은 그 목적을 다 했으니 더이상 남겨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1920년 회사령을 철폐하여 한국인들에게도 일부 기업설립의 자유를 허용함과 동시에 일본기업이 조선에 자유롭게 진출하게 할 목적도 가졌다. 어쨋든 회사령 철폐로 인해 일부 한국 기업가들은 이 기회를 살려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였고 동시에 일본 자본의 진출이 더욱 활발해져 한국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일제는 1923년에 일본과 조선 사이의 교역에 부과되던 관세도 폐지해서 일본 자본의 진출을 더욱 부추기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자본이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2년전에는 쌀 폭등까지 일어났는데 이때문에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토지조사사업]이 끝나 있던 상태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겠다 생각한 일본은 '산민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쉽게 말해, 일본의 인구증가와 산업화로 인해 쌀 수요가 급증하자, 조선에서 쌀 생산을 늘려 이를 일본으로 수출하려는 목적이였다.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농업기술의 개선, 수리시설 확충, 품종 개량 등 쌀 생산량을 늘리는 기술이 집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긴 하였지만, 이로인해 조선 농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으며, 쌀 생산량이 늘어났어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기에 조선 내에서의 식량부족은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농민봉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조선인들은 쌀을 빼앗기고 오히려 잡곡을 더 먹게되는 등 농민 빈궁화를 더욱더 빨리 찾아오게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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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산미증식 계획의 내용을 좀 살펴보면, 논 40만에 물을 넣는 관개를 하고, 밭20만을 논으로 개량하는 등 토지개량을 시작. 토지개량이 되었다면 1년에 9백만석의 쌀을 만들어내면 일본이 여기서 7백만석을 가져갈 것이라는 계획하에 시행한다. 하지만,  그만큼의 쌀을 증식하려면 그만한 자본금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 당시 일본의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던 때였다. 결국 이런 산미증식계획은 돈이 부족해서 실패하게 된다. 

1920년 청년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소년운동도 함께 전개되었다. 진주소년회는 일제강점기 진주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조직으로, '3*1운동'이후 각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회, 소년회 운동의 일환이였다. 주로 청소년과 청년들의 교육과 계몽을 목적으로 활동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활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과 연결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사회에서 독립운동 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같은 청년단체들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진주 소년운동가 '강영호'선생

그리고 1921년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천도교 소년회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인 소년운동이 시작된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우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어린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올바르게 키우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인재를 키워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도교 소년회는 5월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기념행사와 소년보호 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여 소년운동의 필요성과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파하였다. 잡지 [어린이]는 종간하는 날까지 소년운동 전개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광복이후 '어린이 날'이 5월5일로 확정된다. 

어린이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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