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9. 19:42ㆍ그날의 이야기

대한민국 현대사에 깊은 충격을 안겨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 사건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민심의 분노를 모아낸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던 대학생이 국가권력의 폭력 앞에서 목숨을 잃은 그 날...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중이던 22살의 청년이었다. 민주화를 갈망했던 그는 당시 군사정권의 통치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박종철은 선배 운동가 박종운의 행방을 묻기 위해 불법 연행되었고, 조사 도중 물고문 등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질식사하였다. 이 후 담당 형사들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도저히 믿기 힘든 답변을 내놓았다. 당연히 이 거짓말은 곧 바로 의심을 샀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한 사회 각계의 노력으로 진실이 드러났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정권 이양을 준비하며 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하였다. 가해 형사들은 일부만 처벌 받았고, 윗선은 법망을 피해갔다. 이에 시민들과 언론, 종교계가 협력하여 사건을 끝까지 파헤쳤고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치를 떨며 분노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고, 전국 곳곳에서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 결과적으로 정부는 '6*29선언'을 발표하며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박종철 열사는 부산 카톨릭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사건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현재 기억의 공간 1987로 조성되어 인권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1987]은 박종철 사건과 6월 항쟁을 배경으로 한 명작으로 이 사건의 본질을 세대에게 다시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철 사건은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권력의 책임, 시민의 감시, 언론의 자유는 중요하게 거론된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우리는 그 기억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