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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13. 11:07잡다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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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소년들이 주축이 된 최초의 십자군 원정은 1212년에 있었다. 어느날 에티엔이라는 양치기 소년이 왕에게 편지를 전하겠다면 먼 길을 떠난다. 신이 성지를 회복하라는 계시를 주었다는 편지였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수많은 소년소녀가 에티에를 따라 나섰다. 대부분 10대 청소년들로써 부모 몰래 도망쳐 나온 아이들부터 거리의 고아들까지 다양했으며 그 수가 3만명에 이르렀다. <어른들과 귀족들은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신이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고, 그래서 순수하다>라는 논리를 펴면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젊은이들이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겠다고 나섰다. 그 충동적인 움직임은 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일군의 소년들이 신성 로마 제국을 떠나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 하나도 변변히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 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동쪽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론 강 유역을 따라 내려갔다. 그들 무리는 수천을 헤아릴 만큼 수가 점점 불어났다. 그들은 도중에 마을이 나타나면 농부들의 식량을 약탈하였다. 어느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길을 물었더니 곧 바다에 당도하게 될 거라고 했다. 소년들은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았다. 모세에게 기적이 일어났듯이,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바다가 자기들에게 길을 열어 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들이 다다른 항구는 마르세유였다. 바다는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며칠을 항구에서 기다렸지만 헛일이었다. 그러던차에 시칠리아 사람 둘이 나타나서 예루살렘까지 배로 데려다 주겠다고 그들에게 제안했다. 소년들은 기적이 일어난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그 두 시칠리아 사람은 튀니지의 어떤 해적단과 짜고 소년들을 예루살렘이 아니라 튀니스로 데려갔다. 항해하던 중 2척의 배는 좌초했고, 5척은 아프리카로 가서 소년 십자군들을 노예로 팔았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영향권이었다. 거기에서 소년들은 모두 헐값에 노예로 팔려 나갔다. 마침 적대적이었던 로마교황과 이슬람술탄의 화해조약이 맺어지면서, 일부 아이들은 본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소년십자군은 겨우 700여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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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는데, 그 영향이 엄청났다. 이 연설에 감동받은 자들이 모여 예루살렘 해방을 위해 제1차 십자군을 진군시켰다. 거기에 참여한 순례자들은 결의에 가득 차 있기는 했으나 군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들의 선두에는 <무소유자>고티에<은자>피에르가 있었다. 피에르가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을 퍼뜨리고 다니는 바람에 그 수가 4만까지 이르렀다. 십자군 병사들은 어느 나라를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동으로만 향했다. 이슬람의 공격을 받고 있는 동로마를 구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식 군대가 아니기에 지휘체계가 엉망이었다. 가는 길에 유태인을 발견하면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며 학살을 자행했다. 먹을 것이 떠어지자 그들은 지나는 곳마다 약탈을 했는데, 그 피해는 동방보다 서방에서 더 심했다. 이 <참된 신앙의 대표자들>이 하루아침에 누더기를 걸친, 야만적이고 위험한 방랑자 무리로 변해 버렸다. 헝가리 왕은 그 역시 기독교인이었지만, 부랑자들로 인한 피해에 화가 단단히 난 나머지 자기 농민들을 십자군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격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인 4천명이 학살당하고, 군중십자군은 1만명이 죽었다.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이슬람국은 셀주크 왕조였다. 이 셀주크 정규군에게 군중십자군은 상대가 되질 않았다. 각 종 유인작전과 매복 등에 의해 군중십자군은 완전히 궤멸당했으며, 포로로 잡힌 자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학살당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고, 군중십자군 중 제대로 돌아온 자는 겨우 3천명 정도였다. 십자군의 얼마 되지 않는 생존자들이 터키 해안에 이르렀을 때, 반인 반수의 야만인이라는 그들의 악명이 이미 높아질대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니케아의 주민들은 털끝만치의 주저도 없이 그들을 처치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군중십자군"이다. 

 

일부 기사들의 통제없이 출발한 군중십자군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총사령관이 되어 예루살렘과 예수의 무덤을 해방시키기 위한 제2차 십자군이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는 전쟁을 경험해 본 4500명의 기사들이 수십만의 순례자들을 지휘했다. 지휘자들은 대부분 장자 상속법 때문에 모든 봉토를 장남에게 빼앗긴 귀족의 지차들이었다. 상속권을 박탈당한 이 젊은 귀족들은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며 이국의 정복하고 땅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성을 하나 정복할 때마다 십자군을 팽개치고 그곳에 정착했다. 정복한 도시의 토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일도 잦았다. 일례로 보에몽 드 타랑트 공작은 사리사욕을 위해 터키 남부의 도시 안티오크를 빼앗으려고 했다. 사정이 이쯤되니 역설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 서방의 귀족들이 자기들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동방의 적과 동맹을 맺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전우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동방의 토후들과 결탁하였고, 그러면 상대방들 역시 그들에 맞서기 위하여 주저 없이 다른 토후들과 연합하였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채,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조차 모르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성의 모든 주민들을 알몸으로 쫓아내는 알비십자군의 만행

 

군중십자군과 소년십자군이 황당한 십자군이었다면 "알비십자군"은 정치적이고 악랄한 십자군이었다. 13세기 초, 프랑스 남부에서 카타리라는 신흥종교가 생겼다. '알비'라는 지역에 알려지면서 시작된 '카타리파'는 북부 프랑스 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남부귀족이 동조하면서 그 세력이 점차 커져갔다. 로마 입장에서는 정식 카톨릭이 아닌 종교가 사세를 확장하니 견제를 하려 했고, 심지어 협상 사신을 카타리파가 죽이면서 결국 카타리파를 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로써 성지회복이 아닌 크리스트교 내부에서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알비십자군이다. 처음 공격은 교황의 직접 요청에 따라 남부지역을 토벌. 그 중 알비십자군의 가장 유명한 전투가 '카르카손'이며 그 장면이 영화로 남아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이 성의 주민들은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하였으며, 죽이지 않는 대신 남녀를 불문하고 알몸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다. 나중에는 프랑스 국왕이 직접 지휘하는 알비십자군이 운영되었고, 계속된 전투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나중엔 시민들 사이에 카톨릭신자와 카타리파 신자가 섞여서 구분이 되질 않자, 그들을 모두 다 죽여버리기로 했다. 카톨릭신자라면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니 문제없다는 것이 알비십자군의 생각이었다. 그 후 프랑스왕은 남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레몽7세에게 항복협정을 맺으면 백작지위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믿고 협정을 맺은 레몽7세는 결국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다. 이 사기협정을 통해 남부 카타리파는 힘을 잃었고 차례차례 정복 당했다. 점령당한 남부지역에선 종교재판이 계속 되었고, 개종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학살 당했다. 약 20년간 알비십자군 토벌전쟁을 통해 100만명이 학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12세 전까지는 이단이라고 불릴만한 큰 사건은 없었다. 그래서 알비십자군이 벌인 전쟁을 최초의 종교재판이라고 한다. 이후로 유럽은 이단을 잡아 죽이는 풍토가 횡횡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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