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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18. 10:14잡다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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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전경. 현존하는 가장 온전한 잉카 유적.

 

잉카제국은 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 이렇게 4개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잉카'라는 단어는 당시 나라를 다스린 황제의 명칭인 '사파 잉카'로부터 따왔다. 잉카(황제)는 자신이 '태양신'의 자손이라 여겼고, 그 아래로 귀족들은 '오레혼(귀가 큰 사람)'이라 불렀다. 주민관리 방법으로 단위를 형성하였는데, 10개 가구를 '충카' 라고 불렀으며 관리자를 '카마욕'이라 하였다. 그리고 카마욕 위에 100명을 관리하는 '파차카 쿠라카', 1000명을 관리하는 '와랑 쿠라카', 10000명을 관리하는 '우누 쿠라카', 또 이들을 감시하는 '토코이리콕(모든 것을 보는자)', 이 위에 전국 88개 지방수도를 담당하는 '토크리콕', 토크리콕 위에는 '아푸(4개 땅 관리자)', 그 아푸 위에 황제 사파잉카가 위치한다. 

 

잉카는 '태양신'을 섬겼다.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나 형제가 대사제 일을 맡았다. 이들도 의식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이 존재했다. 사파잉카(황제)는 태양과 동일시 되었으며, 태양이 하루에 한 번 지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고 믿었기에, 사파잉카의 손이 닿으면 그 순간 버려졌다. 사파잉카가 한번 입은 옷은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으며, 한번 동침한 여자도 하루가 지나면 버려지고 일종의 궁녀 신분으로 되어 평생 사파잉카를 위해 잡일을 해야 했다. 사파잉카는 스스로 걸어서는 안되기에 어딜가든 황금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누구든 사파잉카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사파잉카를 알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잉카제국 지도상 범위

 

잉카제국은 시민들을 노동력 단위로 관리했다. 잉카의 시민들은 1년에 108일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는데, 도로를 닦고 요새를 건설하고, 신전을 건설하는 등 일을 해야했다. 노동을 하는 날짜를 가족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는데, 4명일 경우 인당 27일/12명이면 인당 9일/54명이면 인당 2일을 일한다. 이런 이유로 잉카의 가족은 대부분 대가족이였다. 

 

잉카의 정복전쟁은 매우 격렬하고 잔인했으며, 정복한 뒤에는 그 지방의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라는 관리로 인정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가장 작은 행정단위로 10명씩 '아이유'라는 집성촌을 만들고,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일을 할 수 없을만큼 늙었거나 병든사람, 과부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 있었다. 가뭄이 나면 마을 창고를 열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또한 의료제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어서 평미들도 병이 나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변방이나 국경지대의 피지배 부족들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잉카는 지방 영주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통치에는 잘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통치 방식에서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것은 피지배민족이 아닌 잉카 황족, 귀족, 사제, 전사, 관리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잉카제국이 한 일은 국가의 땅이나 사원의 땅에서 농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이 창고에 보관된 옷과 곡식은 군대, 황제를 위해 일하는 수공업자, 공공사업을 위해 징모된 노동자, 쿠스코와 그 외 도시에 거주하는 관리들을 입히고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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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도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국가에 닥친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매년 피지배민족들에게 받는 공물리스트에 어린아이를 포함시켰다. 카파코차라고 해서 태양신 인티와 비라코차를 위해 희생시키는 아이들을 1년간 먹이고 재운 뒤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였다. 아이들을 1년간 신전에서 집단생활을 하게 한 다음, 각자 출신지로 돌아가는 길에 산 정상에서 교살당하거나 둔기를 맞아 사망하고, 또는 동굴에 집어넣고 문을 폐쇄해 아사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연간 수십명의 어린아이를 희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축제시기엔 죽은 황제의 미라를 꺼내어 어린이들을 참수해 그 피로 미라의 얼굴에 표식을 그리거나 우상의 주변을 걷게 한 다음 죽이는 일도 있었다. 신전을 새로 지을 때마다 어린이를 죽여 파묻었다. 태양신전 건공식에서 잘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교살되어 신전바닥에 묻혔다. 덕분에 어쩔수 없이 자신의 아이를 바쳐야만 했던 지방 영주들에게 악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잉카의 부족들은 결정론을 믿었고 세습적 계급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직업은 출생으로 결정되었다. 농부의 아들은 농부가 되고, 무사의 아들은 무사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세습과정에서 혹시 모를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기위해 아이들의 몸에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새겼다. 아이들이 정수리가 굳기 전 발딱거리는 갓난아이의 머리를 나무로 만든 특별한 바이스에 물려놓는다. 그 바이스로 아이들의 머리통 모양을 만들었는데, 왕의 자식들은 네모지게/무사의 자식들은 세모지게/농부의 자식들은 뾰족하게 하였다. 머리통 모ㅖ급양을 주어진 틀에 맞추어 가는 과정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버드렁니를 교정하기 위해 치아보정기구를 달고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아이들의 물렁물렁한 머리통은 나무틀 속에서 그 형태로 단단해진다. 그러고 나면, 설령 왕자가 발가벗은 채 거리에 버려진다 해도 그게 왕자라는 것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네모꼴의 왕관을 쓸 수 있는 네모진 머리를 가진 아이는 왕자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저마다 사회적 계급과 직능을 머리통에 찍고 평생을 살아야 했기에 잉카사회는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고, 개인적인 야망이 피어날 여지가 없었다.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쿠바와 멕시코, 미국 플로리다, 카리브 해 일대 등 북아메리카를 장악한 뒤 광대한 남아메리카로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파나마를 정복한 후 태평양으로 진출해 잉카제국으로 들어간다. 스페인의 선봉장 프란시스코 피사로! 당시 잉카제국은 아타우알파가 형 우아스카르황제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할 때였다. 내전을 막 끝내고 귀환하던 중 200명에 불과한 피사로 일당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황제와 피사로가 회담을 하던 중,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황제에게 '성경(BIBLE)'을 건넸는데 황제는 땅에 내던졌고, 이때 회담장 안에 황제근위대 6000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석기곤봉과 투석구는 스페인의 강철갑옷에 통하지 않았고, 숨어있던 스페인 포병의 맹포격과 기병 돌격으로 4000명이 살육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혀버린다. 이에 비해 스페인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다. 피사로는 황제를 바로 죽이지 않았고, 저항없이 순조롭게 통치하는데 이용하였다. 이후 황제는 자신이 감금된 방을 가리키면서 자신을 풀어주면 그 방을 황금으로 채워주겠다고 하였고, 피사로는 이것에 동의하였다. 이후로 계속 황금을 상납받게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군 내부의 의견차이로 카톨릭 개종을 하고 교수형에 처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개종하지 않고 화형에 처하게 될 것인지 선택하게 하였으며, 황제는 전자를 선택하여 처형되었다. 

 

아타우알파가 실제 갇혔던 방

 

중앙정부의 잔인한 학살과 폭정으로 지방 및 변방세력의 반감을 사고, 그런 와중 스페인군이 쳐들어와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때 잉카제국은 내전문제까지 겹쳤으니 그야말로 망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였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천연두까지 널리 퍼져 전염병으로 사망한 자들도 엄청났다. 

 

잉카 최후의 보루 '빌카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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