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8. 07:38ㆍ잡다한 지식
두 문명이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미묘하기 마련이다. 그 만남은 기존 체제에 대한 재검토를 야기하는 위대한 순간이다. 인류가 경험한 그런 문명의 충돌 중에서 18세기에 노예로 끌려 온 아프리카 흑인들의 경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노예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설탕' 때문이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영국은 흑인 노예를 상품처럼 대서양을 가로질러 대륙에 팔아넘기는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그로인해 아프리카 넓은 대륙에서는 사방에서 인간사냥이 벌어졌다. 그들을 태워 온 노예선은 '바다에 떠다니는 관'에 비유될 정도였다. 그들의 손과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졌고,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간신히 뒤척일 정도의 공간 외에는 전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으며, 가만히 누운 채 평균 100일 동안 긴 항해를 견뎌야 했다. 그들은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기에 누워있는 상태로 용변을 봐야 했다. 그들의 배설물은 그대로 아래로 흘러 아래층에 있는 노예들에게 고스란히 떨어졌고, 흔들거리는 배로 인해 멀미와 구토는 계속 되었다. 갑판 아래는 악취로 가득했고 심지어 산소마저 부족했다. 식사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지급되었고 물도 부족해 영양실조와 탈수증에 시달려야 했다. 수시로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그렇게 죽어버린 노예들은 그냥 바다에 버려졌다. 흑인 노예 시체들이 떠다니니까 날마다 상어가 배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 긴 여행을 끝냈을 때, 그들은 두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바다였고, 또 하나는 하얀 피부를 가진 유럽인들이었다.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외계인이나 다름 없었다.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피부색도 이상했으며 입고있는 옷도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많은 흑인들이 무서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살아남은 흑인들은 갈수록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한 가지 예로, 백인들이 포두주 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이 피, 그것도 자기 흑인들의 피라고 믿었다.
이렇게 약 300여년간 지속된 노예무역에 의해 거의 4000만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팔려나갔다. 중남미, 서인도제도, 아메리카대륙 등에 도착한 뒤로 갑판 위에 진열되어 마치 경매장처럼 구매자와 배의 선장 간의 가격 흥정이 벌어졌다. 낙찰받은 노예들은 주인들의 재산이 되어 노출된 피부쪽에 이니셜이 낙인되었다. 이렇게 팔려나간 노예들은 사탕수수 농장과 담배농장 그리고 광산 등에서 일을 하게 된다. 하루 17시간 이상 격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작은 신음이라도 내면 살벌한 채찍이 그들을 때렸다. 피곤한 기색이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처벌이 내려졌다. 오죽하면 설탕에 '악마의 창조물' 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계를 통해 면직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이에 목화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담배를 생산하던 농장들은 큰돈이 되는 목화재배농장으로 변모하였다. 목화송이는 사람 손으로 일일이 따야하는 고된 작없이었는데, 빠르게 목화송이에서 씨를 분리해주는 기계로 인해 목화송이를 더 빨리 따야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더 많은 노예들이 잡혀오게 되었다.
미국 남부에서 이렇게 목화로 인해 노예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반면 북부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업위주의 경제로 바뀌었다. 이에 북부에서는 점차 노예의 수가 줄기 시작했고 북부의 흑인들은 점점 자유인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808년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 수입 금집법이 생겼다. 이에 남부 농장들은 노예들끼리 짝지어 서로 자식들을 낳도록 강요했으며 그렇게 노예 수를 늘려갔고, 심지어 자유인이 된 북부 흑인들을 납치하거나 남부에 팔아버리는 일까지 생겨났다. 이에 조선 추노꾼처럼 전문 노예사냥꾼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도망다니는 노예들이 나오자 남부에서는 자유주인 북부에서 잡히더라도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하는 법을 만들기도 하면서, 남부에서는 노예제도 폐지를 맹렬히 반대하는 법안까지 올라온다. 그러다 결국 남과 북이 전쟁을 일으킨 남북전쟁이 발발하였고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포한다. 또 남북전쟁은 북부가 승리하면서 1865년에 비로소 노예들이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되고 나서도 흑백 간의 불평등은 지속되었고 현재까지도 수많은 흑인들이 차별받고 있다.
요즘은 흑인들뿐 아니라 아시아인들 마저 차별받고 있는데, 인종에 따라 계급이나 등급을 매기고 차별을 한다는 건 야만스런 행위다. 전세계적으로 역사상 노예가 없는 나라는 없었던 것을 따져보면, 어느 나라든 기득권층의 횡포는 다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세계 최대 노예무역 국가였던 영국이 어떻게 노예무역을 폐지하게 되었을까. 윌리엄 월버포스 같은 정치가들의 활약이 있었다. 윌리엄 월버포스는 영구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켐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21세의 나이로 요크셔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다. 25세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당시 타락한 영국 정치계를 떠나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가 존 뉴턴의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아 월버포스는 심사숙고 끝에 정치에 남기로 결정한다.
월버포스는 남의 생애 거의 대부분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일관하였다. "노예 매매는 너무 엄청나고 무시무시하며 치유할 수 없는 악습이기에 나는 그것을 폐지하기위해 싸우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결과가 어떠하든 나는 이제부터 폐지가 성사될 때까지 멈추지 않겠습니다." 라며 그것이 자신의 소명으로 깨닫고 실행한다. 많은 조롱과 반대에 부딪혔지만, 기독교적 확신을 의회 정책에 반영시키려는 열망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으며, 7년 후 노예 무역에 대한 법안을 제출, 시간이 흘러 점점 그의 진실이 통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영국에서는 월버포스의 오래고 끈질긴 삶을 통해, 그가 죽기 3일 전인 1825년 상하원 모두 통과되어 노예제도가 영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45년간의 오래고 줄기찬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광을 얻었다. 월버포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복음적이고 성격에 충실한 방법으로 오랜 시간을 걸쳐 싸워 노예제도 폐지 등 사회개혁을 이끌어 낸 살아있는 영성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