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다노 부르노(Giordano Bruno);자유사상가,무한우주론,아리우스파,우주생명체,차원이론,암기력의대가.

2023. 7. 9. 19:25잡다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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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다노 부르노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것이 1543년, 그리고 갈릴레이가 이 지동설을 부정하여 유폐된 것이 1616년. 그 사이 나폴리 출신 '조르다노 부르노'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으며 신학자가 될 뻔 했다가,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를 수용하는 발언으로 이단죄로 몰려 칼뱅주의가 만연했던 제네바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곳 역시 자신과 사상이 맞질 않아 떠나고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영국과 독일 등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교회법과 민법의 2만6천 구절을 암송할 수 있었고, 성서에서 발췌한 7천개의 문장과 오비디우스의 시 1쳔여편을 외우고 있었다. 그 타고난 기억력때문에 그는 유럽 도처의 강의실에서 천재로 통하였고, 어디에서든 수학과 천문학과 철학을 기꺼이 논하였다. 또 뛰어난 언변과 풍부한 교양으로 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르노는 우주는 무한하며 지구는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고, 태양은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외계생물체와 우주의 다양한 차원의 존재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그 가운데 우주는 무한하고 태양계와 비슷한 수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과 아울러 성서는 천문학적 함축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가르침 때문에 추종해야 한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훗날 갈릴레이도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브루노는 다양한 저술을 통해 자신의 종교관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종교가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고 통치하는 수단이라고 한 반면 철학은 스스로 행동하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학문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칼뱅주의에 반대하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이 존엄하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종교의 평화공존을 추구했다. 결국 그는 1589년 1월 헬름슈테트에서 루터교에 의해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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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자유도시인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간다. 그런데 그의 자유로운 행동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태도는 그를 베네치아로 초대한 귀족 모체니코의 격분을 샀다. 모체니코는 결국 그를 베네치아의 종교재판소에 이단죄로 고발하였다. 그 뒤 로마 종교재판소에서 그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듬해 로마교황청 소속 감옥에 수감된 브루노는 7년동안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22차례나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이론을 무조건 철회하라는 재판관들에 맞서 자신의 의견이 그르지 않음을 이해시키려 하였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자신이 철회할 만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에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 센 이단자라고 하였고 그의 명령에 따라 브루노는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로마광장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선고를 받았을 때 브루노는 "선고를 받는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더 클 것이오."라는 말을 남겼다. 

 

형리들은 그가 화형 장작더미에 올라가서조차 무한한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까봐 그의 혀에 못을 박았다. 그가 감옥에서 작성한 유서도 개봉하지 않았고, 그의 이단적인 견해가 퍼져 나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위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가 불에 타면서 죽어가고 있을 때 참된 신앙인들은 그에게 십자가를 전해 주었따. 그러나 그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 앞에서 이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그의 죽음은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자유인의 모범을 보이며 사상의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로 남았다. 그의 사상은 또한 현대 휴머니즘적 행동주의에도 영향을 끼쳤고, 그는 '자유로운 사고'의 순교자로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남과 다른 사고를 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피오리 시장에 있는 조르다노 부르노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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