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정묘호란;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공. 정묘호란 원인, 전쟁 과정, 정묘호란 결과, 강화조약 체결, 정묘호란 유적지, 연미정, 곡성

2024. 3. 1. 18:24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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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이 조선을 침공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중립외교 정책을 펴며 후금과 별 탈없이 지내고 있었다. 또한 명나라와도 여전히 무난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죽은 후 중립외교정책은 무산되어 다시 오랜 우정의 관계인 명나라와의 관계만 유지하고, 후금과는 관계가 어긋나게 된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 정복을 노리고 있었는데 뒤에서 몰래 명을 지원하는 조선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결국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그 지원세력을 끊어버릴 목적으로 조선을 먼저 공격한다.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 시작!
1627년 1월 13일, 가장 먼저 의주 공격이 시작된다. 쳐들어 온 후금의 병력은 약 3만대군임에 비해 의주에 주둔해 있던 조선군은 약 3천명이였다. 적들은 기습공격으로 수문장을 죽이고 성 안으로 침투해 왔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완'도 시가전을 하며 싸우다 전사하셨다. 후금은 조선군의 전략을 이미 다 파악한 상태였다. '속전속결~!' 조선군이 집결하기 전에 먼저 쳐 부셔야 한다는 논리만 있었다. 어쨋든 1차 방어선 의주는 다 하루만에 함락되었다...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면, 연락망이다. 성은 13일에 함락되었는데, 조정에는 17일에 보고가 당도했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접할 때는 이미 후금은 다음 목적지로 향했거나 벌써 당도했을 것이다. 

조선군은 이미 임진왜란을 겪어 본 터라, 조선장병들도 이젠 조총을 다루고 있었다. 조선군 병사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지만 사실 후금도 이미 겪어 본 터라, 조선군이 재장전할 때를 노려, 한번 '따다당' 할 땐 숨어있다가 재장전 하는 그 타이밍에 딱 쳐들어가서 곧 장 성내로 들어간다. 정주목사 김진과 곽산군수 박유건을 포로로 잡는다. 15일, 저항했던 조선군사 전부 살해하고 능한산성도 함락된다. 

18일 후금이 안주에 도착한다. 안주성은 요새인지라 조정에서도 기대를 하고 있던 곳인데, 역시 두세번 공격을 막아낸다. 그러나 3차 공격에 결국 함락되었다. 사실 안주성도 군민이 약 3만명쯤 되었는데, 총쏘고 대포쏘고 활쏘고 다 해도, 후금의 뛰어난 공성전에 무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당시 후금의 공성전술이 매우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때 뛰어난 장군이라 칭했던 남이흥과 부하장수들이 나름 최선을 다해 싸우다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 이때 쯤 되니 조정에서도 피난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안주가 함락되고 나니 그 뒤의 작은 성들은 우후죽순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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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조정 대신들도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의견은 둘이다. 이제 적들을 진격해오는 임진강에서 막아낼것이냐VS군대를 남한산성으로 보낼것이냐? 피난가면 어느 군대가 따라갈 것인가? 훈련도감 군대를 쓸까 아니면 수원병력을 쓸까? 이런 상황에서도 대신들은 긴 시간 수없는 논쟁만 계속한다. 쩝~ 26일. 드디어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때 후금군이 황해도까지 와서 사신을 보낸다. "화친을 맺자~" . 당시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에 약탈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단지 '친금배명' 차원에서 화친을 맺자는 사신을 보낸것이다. 

"두 나라가 화친하고 좋게 지내자는 것은 다 함께 아름다운 일이다. 귀국이 참으로 화친을 바란다면, 꼭 종전대로 명나라를 섬기지 말고 그들과 왕래를 끊고서 우리가 형이 되고 귀국이 아우가 되자! 이에 명나라가 노여워 한다면 우리 이웃나라가 가까이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이와 뜻이 같다면 우리 두 나라가 하늘에 고하고 맹세하여 영원히 형제의 나라가 되어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하자. 일이 끝난 뒤 '상벌'을 내리는 격식은 귀국의 조처에 달렸으니, 국사를 담당할 만한 대신을 차출하여 속히 결정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오가는 길에 시간만 지연되고 서로 불편할 터이니, 우리가 신의가 없다고 여기지 말도록..."
어쨋든 이를 계기로 조선도 나름 시간을 끈다. 그리고 그 시간안에 강화도와 임진강 수비병력을 강화한다. 하지만 여전히 조정에서는 '임진강 계속 방어VS포기'로 논란중이였다.  이때 결국 후금의 재촉으로 조선과 후금의 정묘조약(강화조약)이 맺어진다. 
"조선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 화친을 위배하거나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다.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하자!" 말은 부드럽지만, 조선군을 엄청 조롱하고 무시하며 맺은 조약이랄 수 있다.

정묘호란은 1627년 1월부터 3월까지 무려 2개월간 일어난 전쟁이였다. 전쟁과정에서 당시 임금이였던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했고, 후금군은 개성 인근까지 단 시일만에 침공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의 합동공격이 이어졌고, 결국 후금에게 불리하게 상황이 돌아가면서 후금에서 먼저 제안하여 조선과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낸 것이다. 조약 내용을 간추리면,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그리고 후금은 압록강을 넘어오지 말것! 후금과 조선은 서로 형제국으로 칭할 것! 후금은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이다. 또 당시 후금은 이미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 상태였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으로 전락하였고, 매년마다 막대한 양의 조공을 청나라에 바치는 것은 물론 무려 20만명의 백성을 인질로 청나라로 보내야 했다. 

 

참고> 정묘호란 유적지

연미정(월곶돈대, 정묘호란 때 후금과 형제의 맹약)

연미정(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 인청광역시.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한 곳.

곡성 충렬문(전남 곡성군 입면 삼오궁동길 101-6)
정묘호란 의병장이던 박언배와 부인 이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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